안녕하세요, 데릭입니다. 얼마 전에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그린빈 바이어 로사가 팀에게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 로사가 말한 단어 하나가 제 귀에 꽂혔는데, 바로 ‘아와사’라는 단어였지요.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아와사(Hawassa)는 커피 산지인 에티오피아 시다마(Sidama)의 가장 큰 도시예요. 시다마, 이르가체페, 구지 등 남부 커피 산지로 향하는 여정의 시작점이기도 하죠. 오랜만에 ‘아와사’라는 이름을 들으니 작년에 다녀온 에티오피아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더군요.

데릭의 에티오피아 트립 여정
자연스럽게 아와사가 위치한 시다마 지역의 커피에 대해서도 떠올려보게 되었어요. 저희가 1월에 절찬리에 소개한 ‘벤사: 알라체 워시드’라는 커피가 바로 시다마 벤사 지역에서 재배한 것이었는데, 지난 여행을 통해 구매했었죠. 시다마 벤사 커피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커피이고, 개인적으로는 ‘연보랏빛’을 떠올리게 되는 커피이기도 해요.
커피를 마신 후에 어떤 색깔이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그 색깔은 참으로 주관적인 것인데요. 저는 어떤 에티오피아 커피를 마시면 ‘연보랏빛’을 떠올리곤 하는데, 대부분 시다마의 커피라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다마가 어떤 곳일지 늘 궁금했었는데요.
오늘 레터에서는 연보랏빛 커피를 찾아 제가 실제로 시다마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아와사'라는 단어를 듣지 못했다면 레터로 쓸 생각을 못했을텐데요. 영감을 준 로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게요.
제가 커피를 마시고 처음 연보랏빛을 떠올린 것은 2018년 말레이시아 페탈링 자야에 있는 어느 카페였어요. 그 카페의 이름은 ‘빈브라더스’인데요. 예전에 Bb레터에도 한번 등장한 적이 있는 크리스티가 벨벳화이트로 따뜻한 플랫화이트를 만들어주었죠. 한 모금 마셨더니 바로 연보랏빛 향미가 느껴져서, “어떻게 커피에서 이런 향이 나지?” 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순간 제가 앉았던 자리가 지금도 떠오를 정도로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네요.

빈브라더스 프탈링자야 매장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저는 한국에 있는 빈브라더스 로스터리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어느 날 문득 그날의 '연보랏빛 커피'가 떠올라 로스터 케이브에게 이야기했죠. 예전에 말레이시아에서 벨벳화이트 플랫화이트를 마셨는데, 보랏빛 꽃 향이 났었다고요. 하지만 그 후로는 좀처럼 그 향을 맡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함께요. 케이브는 에티오피아 커피의 세계에서도 꽃 향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것인지 이야기해 줬고, 저는 ‘그날 내가 운이 좋았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 같아요.
또 몇 년이 지난 2023년 어느 날, 로스터리에서 에티오피아 커피를 평가하는 커핑을 하고 있었는데요. 어떤 커피에서 연보랏빛 꽃 향이 나는 거예요. 블라인드 커핑이라 커피의 정보를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시다마 벤사 지역의 하마쇼(Hamasho)라는 가공소에서 생산된 커피였어요. 불현듯 예전에 말레이시아에서 마셨던 연보랏빛 향미의 커피가 떠올랐고, 혹시 이것이 ‘시다마 벤사’ 지역 커피의 특징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보게 되었지요. 그 후로 로스터리 커핑에서 드물게 연보랏빛 꽃 향을 느낄 때마다 시다마 지역의 커피인 경우가 많아서, 저의 추정은 점차 확신에 가까운 감정으로 발전해 나갔어요.
그러다 비교적 최근인 2025년 1월,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에 가 보게 되었어요. 주요 커피 산지인 에티오피아 남부 지역의 시다마와 이르가체페, 구지 지역을 탐방하는 여행이었죠. 커피 회사로선 방문하는 모든 지역이 중요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갔던 곳은 역시 시다마였어요. 과연 연보랏빛 향미의 커피가 자라는 곳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죠.(부연하자면 같은 시다마 커피도, 사람마다 떠올리는 색이 다르더라고요. 연보랏빛은 저의 해석이었던 것 같아요.)
에티오피아는 한국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인천에서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까지 운행하는 직항 노선이 있어서 중남미 산지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이동했어요. 다만 아디스아바바 공항부터 도심에 있는 호텔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둘러봐도, 제가 생각했던 ‘낭만적인’ 에티오피아의 느낌이 들진 않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아디스아바바는 인구가 4백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니까요.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인 에티오피아지만, 수도만큼은 다른 국가의 도시에 비해 기술적으로 많이 뒤떨어진 느낌은 아니었어요. 어쩌면 제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다니는 곳만 다녀서 그렇게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아디스아바바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에티오피아 남부 산지 여행의 거점인 ‘아와사’로 향했어요. 늦은 오후 비행기를 탔던 터라, 아와사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는데요. 공항에 내려 바라본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더라고요. 이번 여행이 너무나 즐거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죠. 에티오피아 여행 경험이 많은 동료분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씀해 주셨지만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정도로 뭉클한 마음이 들었던 게 생각나네요.

해 질 녘의 아와사 공항
아와사에서의 첫 일정은, 시내에 있는 카페에 들러 모닝커피를 마시는 일이었어요. 두카모 커피(Dukamo Coffee)라는, 현지 커피 수출업체 다예 벤사(Daye Bensa)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갔지요. 멋들어진 인테리어에 카페가 갖춰야 할 기자재들은 거의 다 갖추고 있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카페였는데요. 요새는 현지 수출업체들이 직접 로스팅 공장을 운영하고, 도시에서 카페도 운영하는 사례가 점점 더 생기고 있다고 해요.

두카모 커피(Dukamo Coffee) 매장
에티오피아 카페의 커피 맛이 어땠는지 궁금하시죠? 어느덧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무래도 내추럴 커피 같다던 케이브의 말이 생각나네요. 커피 가격은 한화로 700원 정도였던 것 같고요. 현지 저렴한 식당의 밥 몇 끼 정도의 가격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에티오피아에 있는 카페에 가서 에티오피아 커피를 마셨는데 맛이 얼마나 중요했겠어요.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시다마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커피 가공소는 알로 커피(Alo Coffee)라는 이름의, 요즘 한국에서 꽤 유명해진 타미루 타데세(Tamiru Tadese)라는 생산자가 운영하는 커피 회사의 가공소였어요. 시다마를 비롯한 다른 여러 가공소를 다닌 후에야, 여기가 시설 면에서 에티오피아 상위의 가공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물이 부족한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물 없이도 커피의 뮤실리지를 제거할 수 있는 기계를 도입하여 워시드 커피 생산을 하고 있었어요.

알로 커피 메인 스테이션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바샤 베켈레(Basha Bekele)라는, 역시나 요즘 한국에서 유명해진 커피 생산자의 가공소였어요. 최근 수요가 많아서 가공소를 계속 늘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실제로 만난 바샤 베켈레는 무척 젊어보이는 청년이었는데요. 컵 오브 엑셀런스(Cup of Excellence)에서의 성공으로 거둔 수익을 다시 커피 산업에 투자함으로써 마을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컵 오브 엑셀런스가 작은 마을에 일으킨 변화를 실제로 보게 된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고, 얼마나 많은 생산자들에게 자극과 동기부여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티오피아 커피 가공소를 방문하면, 분나라고 부르는 커피를 내어 줘요. 분나(Bunna)는 에티오피아 암하라어(Amharic)로 커피라는 뜻이고요. 가공소에서 직접 로스팅 한 후 맷돌(?)로 갈아서, 뜨거운 물로 내려주는 커피인데요. 물을 팔팔 끓이기 때문에 커피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이 컵에 다 담겨 있는 느낌이에요. 따로 필터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질감이 꽤 거친 편이고요. 터키식 커피를 떠올리면 얼추 비슷할 것 같네요.
가공소 직원께서 분나를 내려주시는 모습에 매번 눈길이 갔는데, 무엇보다 분나가 담긴 잔이 매력적이었어요. 제가 잔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걸 본 어떤 분이, 공항에서 판매하니까 귀국할 때 사 가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공항 가격이 꽤 비싼 것 같더라고요. 혹시 에티오피아에 방문하셔서 이 잔을 사고 싶으시다면, 아디스아바바 시내에서 사시는 게 가격이 좋을 것 같아요.

분나를 내리는 모습
시다마를 시작으로 이르가체페와 구지까지, 제가 들른 모든 가공소에서 분나를 내어주셨는데요. 돌아보면 알로 커피와 바샤 베켈레의 가공소에서 마신 분나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시다마 커피에 푹 빠진 제가 공정하게 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제 입에 맞게 로스팅하고 추출한다면 정말 맛있을 것 같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시다마의 여러 농장과 가공소를 방문하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꼈던 게 하나 있어요. 바로 저희가 방문한, 현재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비싼 커피를 재배하고 있는 농장들이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요. 다 차로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커피의 ‘떼루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특별히 생각할 일이 많지 않았는데요. 시다마의 작은 동네에서 컵 오브 엑셀런스의 1위가 지속적으로 나왔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더군요.
4일 간의 밀도 있는 남부 여행을 마친 후에는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돌아왔어요. 방문한 가공소의 커피를 한 번에 모아서 평가하기 위해서였지요. 벨벳화이트와 블랙수트의 재료로 쓰이는 에티오피아도 구매해야 하고, 다양한 싱글용 커피도 찾아야 했기에 무척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다만 에티오피아 여행 막바지였고, 이틀 내내 하루 종일 커피만 마시는 일정이었기에 무척 피곤한 상황에서 평가해야 했던 기억이 나네요.
과연 제가 에티오피아에서 연보랏빛 향미의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지, 또 왜 그런 향미가 나는지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신가요? 제가 알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모든 시다마 벤사의 커피가 연보랏빛 향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어요. 가공 방식에 따라 향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워낙 그런 향미의 커피가 희소한 것 같기도 했어요. 제가 시다마 벤사의 모든 커피를 마셔본 것도 아니기에, 앞으로는 연보랏빛 향미와 너무 연결시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죠.
그래도 제가 재미있게 기억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어요. 길거리에서 보라색 꽃이 핀 나무를 꽤 많이 보았거든요. 물론 노란 꽃도 보았고, 빨간 꽃도 보았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이렇게 보랏빛 꽃을 많이 본 적이 있나 하고 생각해 봤을 땐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더라고요. 아마 제가 ‘연보랏빛’에 너무 집착해서, 거기에 들어맞는 장면들만 주의 깊게 보았기 때문이겠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2025년 어느 날, 저는 여느 때처럼 로스터리에서 커핑을 하고 있었어요. 에티오피아 커피를 평가하는 날이었죠. 커핑을 마치고 팀원들과 돌아가면서 각 커피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요. 제가 어떤 커피가 '시다마에서 재배한 내추럴 커피' 같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알로 커피에서 생산한 내추럴 커피였어서 팀원들이 놀랐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실상은, 작년에 출시한 ‘에티오피아 하로 와추’와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인데요. 하로 와추는 시다마가 아닌 '구지' 지역에 있는 가공소죠. 하루 와추를 시다마의 가공소로 착각하고 엄한 이야기를 했던 것인데, 이미 팀원들 앞에서 어깨를 으쓱했던 터라 굳이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이날 마셨던 커피의 이름은 다가오는 3월에 출시하게 될 ‘벤사: 미리가 내추럴’입니다.)
그리고는 또 한동안 연보랏빛 커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올해 초에 '벤사 시리즈'를 출시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작년 시다마 여행을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제가 연보랏빛이라고 느끼는 커피가 얼마나 드문지 알게 된 이후, 더 이상 시다마 벤사와 그 색을 연결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 지난 여행의 결론이었는요. 제 마음속의 이 연보랏빛 커피에 대한 낭만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진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동안 적지 않은 커피를 마셔왔는데도, 이렇게 어떤 커피에 매혹되고 환상을 갖게 된 적이 있었나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요.
독자님은 어떤 커피에서 연보랏빛 향미를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혹시 그것은 에티오피아 시다마의 커피였나요? 아직 Bb 팀에서는 저처럼 느끼는 분을 잘 못 만나봤는데요. 혹여나 Bb레터 독자님 중에 계실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