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트럼’이란 단어는 여러 맥락에서 쓰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분광기를 통해 빛이 분해되어 나타나는 무지개 같은 모습일 텐데요. 빛이 아니더라도, 강도의 분포가 있거나 넓고 좁음이 있다면 스펙트럼이란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아요.
빈브라더스에서 진행하는 테이스팅 프로그램 <스펙트럼>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출발했습니다. 초기에는 여러 잔의 커피를 한자리에서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자체가 즐거워서 시작했는데요. 1년 반 넘게 이어오다 보니 조금씩 발전하는 부분도 생기고, 그 과정에서 나름의 의미도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오늘은 <스펙트럼>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팀이 어떤 고민을 거쳐 발전시켜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려 합니다. 여러 잔의 커피를 함께 맛보며 즐거움을 느껴보신 경험이 있다면, 아마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스펙트럼’이란 단어가 빈브라더스의 상품명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2022년 8월이었어요. 당시 ‘언스페셜티 월픽’이라는 원두 구매 서비스의 협업 로스터리로 참여하게 되었고, 기획 상품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스펙트럼>이었죠. 에티오피아 커피를 다섯 가지 로스팅 단계로 나눈 샘플 세트였고, 이름처럼 에티오피아 커피의 로스팅 스펙트럼을 경험할 수 있는 상품이었어요.
기획의 배경은 그해 초 김선민 로스터가 Bb 팀을 위해 준비해 준 내부 테이스팅이었어요. 매력적인 브라질 커피를 11단계의 로스팅 샘플로 나누어 모든 매장 바리스타 팀에 보내주었는데, 이 경험이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래서 언젠가 상품으로 만들어 고객분들께도 선보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언스페셜티 월픽을 진행하게 되면서 그 아이디어를 녹여내었던 거죠. 다만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해, 11단계가 아닌 5단계 로스팅으로 상품을 구성했고요.
반응이 꽤 좋았어요. 그래서 다음 해에는 과테말라 버전으로 출시하겠다고 호기롭게 공약까지 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어요. 일단 모든 로스팅 정도에서 뚜렷한 매력을 보여주는 과테말라 커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고요. 제작 비용이 큰 상품이기도 해서, 애매한 커피로 타협해 내놓기에는 아쉬움이 컸어요.
그렇게 <스펙트럼>은 한때 반짝했던 기획 상품으로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는데요.

그로부터 1년 반쯤 지난 2024년 3월,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빈브라더스 커피하우스 서울’을 열게 되었어요. 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일반 카페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커피 경험을 위한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어요. 5층 스튜디오와 6층 바가 그런 곳인데요. 빠르고 효율적인 운영이 필요한 카페와 달리, 이곳들은 천천히 커피를 음미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설계가 되었어요. 물론 두 공간의 특성은 제법 다르지만요.
좋은 공간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테이스팅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어요.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끔 로스터리에서 종종 맛보는 흥미로운 커피들을 활용하면 되니 그리 어려운 일로 느껴지진 않았지요.
첫 시작은 ‘인도네시아 컵 오브 엑셀런스’ 샘플 커핑이었어요. 그린빈 바이어 로사가 실제로 인도네시아 현지에 가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평가했던 커피라, 참가자분들께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이를 시작으로 5층 스튜디오에서는 다양한 경매 샘플의 커핑을 이어갔어요.

5층 스튜디오의 <스펙트럼>이 주로 커핑 세션에 집중했다면, 6층 바의 <스펙트럼>은 조금 다른 내용으로 운영했어요. 2024년 8월, ‘시네소 MVP 하이드라’라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6층 바에서 테스트하고 있었는데요. 실제로 사용해 보니 머신이 상당히 정교하고, 압력 프로파일의 변주를 통해 같은 커피라도 상당히 다른 향미를 갖게 할 수가 있더라고요.
우리에게 이렇게 재미있다면, 다른 커피 업계 동료분들도 분명 흥미로워하실 거라 생각해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어요. 향미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기 위한 숙련도가 필요한 프로그램이었는데, 많은 바리스타 분들이 즐겁게 참여해 주셔서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후에도 흥미로운 기자재를 활용한 프로그램들을 계속 만들어 진행하고 있어요.

전환점이 된 순간
주로 경매 샘플 커핑으로 진행되던 5층 스튜디오의 <스펙트럼>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 것은 최근의 일이에요. 지난 8월 열린 <스펙트럼: 라틴 아메리카>가 그 계기였죠. 7월과 8월에 저희가 라틴 아메리카의 커피를 많이 출시하게 되면서, 꽤 다채로운 라틴 아메리카 스펙트럼을 선보일 수가 있었거든요. 처음으로 모두 Bb의 커피로만 구성한 프로그램이었어요.
준비하면서도 ‘과연 오신 분들이 좋아하실까?’ 하는 걱정이 있었어요. 이전에는 엘 인헤르토(El Injerto)나 카페 그랑하 라 에스페란사(Cafe Granja La Esperanza, CGLE)처럼 이름값이 높은 농장의 커피로 <스펙트럼>을 꾸려왔는데, ‘라틴 아메리카’라는 주제가 과연 매력적으로 다가올까 하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하나하나 공들여 구매한 좋은 커피들이지만, 어디선가 이미 드셔보신 분들께는 새로움이 덜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스펙트럼: 라틴 아메리카>를 진행해 보니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더라고요. 멕시코와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브라질, 페루의 커피 8종을 마셨는데, 저도 이렇게 다양한 라틴 아메리카 커피를 좋은 품질로 한자리에서 경험해 본 적이 있었나 싶었어요.
<스펙트럼: 라틴 아메리카> 커피 리스트
• 멕시코 소치아팜 (티피카, 플루마 / 워시드)
• 코스타리카 엘 베나도 (SL28 / 허니)
• 콜롬비아 엘 파라이소 (카투라 / 내추럴)
• 콜롬비아 라스 마가리타스 (파카마라 / 내추럴)
• 브라질 사맘바이아 (옐로 카투아이 / 내추럴)
• 브라질 아란치스 (아라라 / 내추럴)
• 페루 로스 실바 (카투라, 버번 / 워시드)
• 페루 산 안토니오 (게이샤 / 무산소 워시드)
품종과 가공 방식을 다양하게 구성했기 때문에 재미있었던 것도 있었어요. 저희가 매달 여러 종의 시즈널 커피를 출시할 때 고객분들께 흥미로운 조합이 되길 기대하며 출시하기 때문에, <스펙트럼>도 그렇게 구성할 수 있었던 거였죠.
매번 <스펙트럼>을 진행하고 나면, 그날 가장 좋았던 커피를 투표로 받아요. <스펙트럼: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커피는 7월에 출시한 ‘콜롬비아 엘 파라이소’였는데요. 샘플 중에 게이샤도 하나 있었기 때문에, 설마 콜롬비아 엘 파라이소가 게이샤를 누르고 1위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콜롬비아 엘 파라이소를 뽑으신 분들의 이유를 듣다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라즈베리와 히비스커스 노트가 선명하고 강도 있게 느껴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다가오는 커피였거든요. 어떤 분께서 이 커피를 마시고 드디어 본인 취향의 커피를 찾은 것 같다고 하셨을 때는, 그동안 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스펙트럼>을 운영했던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스펙트럼: 라틴 아메리카>를 통해 유명 경매 샘플과 비교해도 Bb 커피 테이스팅이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동시에 앞으로는 더욱 선명한 주제가 있는 <스펙트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그 주제가 품종이든, 가공 방식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요. 매달 새로운 커피를 출시하니, 거기서 얼마든지 흥미로운 주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게 되었어요.

<스펙트럼>을 통해 본인의 커피 취향을 찾으셨다는 말만큼이나 기뻤던 피드백은, ‘커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잘 없는데, 같은 커피를 맛본 분들과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씀이었어요. 커피를 내리고 마시는 일은 본질적으로 아주 개인적인 경험이라, 누군가와 함께 즐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죠.
매번 <스펙트럼>을 진행할 때마다 참가자분들께, 커피를 맛보는 시간 못지않게 이후에 나누는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려요. 다른 분들의 코멘트를 통해 많이 배워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린 말씀인데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배움을 넘어선 어떤 즐거움을 느끼셨다면 프로그램 기획자로서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있을까 싶어요.
아쉬운 점은, 오프라인 경험의 특성상 참여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신청 설문에 담긴 사연들을 정성껏 읽고 선정하지만, 함께하지 못하게 된 분들께는 늘 죄송한 마음인데요. 더 많은 분과 이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니, 혹시 아이디어가 있으시다면 꼭 들려주세요.

이렇게 쭉 적어놓고 보니 저도 정리가 되는 기분인데요. <스펙트럼>의 여정은 이제 시작인 듯해요. 저희는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커피를 출시할 예정이니, Bb 커피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계속 선보일 수 있겠죠?
앞으로도 흥미로운 주제의 테이스팅 프로그램으로 찾아뵐 것을 약속드리며, 오늘 레터는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다음 레터로 다시 인사드릴 때까지, 모두 즐거운 커피 생활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