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어쩌면 커피 애호가의 숫자만큼 많을지 모르지만, 저처럼 에티오피아 커피가 좋아서 커피에 입문하게 되는 경우도 꽤 많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벨벳화이트를 마시고 처음으로 어떤 커피의 팬이 되는 경험을 했고, 지금 읽기엔 조금 부끄럽지만 <최고의 벨벳화이트>라는 레터를 통해 팬심을 표현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 동아프리카 나라의 커피를 오랫동안 흠모해 왔는데, 지난 1월 드디어 에티오피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린빈 바이어 로사의 에티오피아 출장을 따라 가장 대표적인 산지인 남부 지역을 다녀온 것이었는데요. 시다마(Sidama)와 이르가체페(Yirgachefe), 구지(Guji)의 가공소를 둘러보고 커피를 샘플링한 후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 돌아와 줄줄이 평가를 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시다마 벤사의 한 가공소
처음 에티오피아를 방문하는 만큼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처럼 에티오피아 커피를 좋아하고, 에티오피아에 오고 싶어 했을 분들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에티오피아에서 좋았던 샘플을 추려서 '스펙트럼: 에티오피아 2025' 커핑 세션도 하고, 빈브라더스 팀과 함께 트립 리뷰도 진행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빈브라더스 유튜브 채널에서 B2B팀의 주와 함께 라이브로 여행 이야기를 들려드리기도 했어요.

‘스펙트럼: 에티오피아 2025’ 커핑 현장
레터를 읽는 독자님들께도 가볍게 에티오피아 커피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어, 딱 커피 한잔하시며 보시면 좋을 분량의 레터를 준비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커피 한 잔 내려봐 주시면, 저도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낭만과 현실 사이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 공항에 도착할 무렵, 드디어 커피의 나라 에티오피아에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설렜습니다.
하지만 공항에 내린 후 저를 반긴 것은 쉴 새 없이 부는 모래바람이었어요.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바람에 먼지가 이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 여러 번 온 적이 있는 일행에게 “아디스 아바바에는 먼지가 참 많네요.”라고 말했더니 “전국적으로 다 그래요.”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여행 중에 보니 아디스 아바바처럼 대도시거나 고속도로가 아니면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도로더라고요.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서는 산속에 들어가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인데 에티오피아는 도로 상태가 사뭇 달랐습니다.

그래도 차량이 많이 다녀서 평평한 편이었던 도로
또한 트립을 마치고 이제 막 떠나시는 분들을 만났는데 음식과 물을 조심해야 한다고 몇 차례 주의를 주셨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건네주신 첫 인사가 음식 조심이라니 어떤 여행을 하셨던 건지 궁금해 여쭤보았더니 오자마자 배탈이 나서 고생하셨던 분들이 꽤 계셨더군요. 고기보다는 채소를 먹고, 얼음은 피해야 한다는 조언을 남기고 그분들은 한국으로 떠나셨어요.
어느 정도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한국에서 에티오피아에 날아왔는데, 오자마자 맞닥뜨린 먼지바람과 미리 오신 분들의 배탈 이야기는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세계 최고의 커피를 생산하는 곳이지만, 아직 도로와 상하수도가 같은 주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개발도상국인 것입니다.
경제
문득 에티오피아의 현재 경제 상황이 궁금해져 웹에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2023년 기준, 에티오피아의 1인당 GDP는 1,272달러로 옆 나라인 소말리아(597달러)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한국이 3만 3천 달러인 점을 감안하시면 어느 정도인지 대략 느낌이 오시죠?

데이터 출처: KOTRA
에티오피아 산업의 구조를 살펴보면 농업과 제조업, 서비스업이 모두 존재하고, 커피와 채소를 비롯한 농업의 중요도가 높은 편입니다. 제조업의 경우 마치 1970년대 한국처럼 섬유와 의류 공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최근에는 경제가 성장하고 도시가 발전하면서 서비스업의 비중도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에티오피아 커피 이야기를 한다면서 웬 경제 이야기냐 하실 수 있지만요. 저는 이번 여행을 하면서 에티오피아 커피 산업의 개별 주체를 이해하려면 에티오피아 국가 경제와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번에 총 12개의 커피 가공소를 방문했는데요. 규모와 설비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큰 흐름에서는 다들 비슷한 느낌이었거든요. 제가 방문했던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개성 있는 농장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어요.
결국 국가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이 어느 정도 고도화되어야 다양성이란 꽃도 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직 에티오피아의 커피 산업은 그런 단계에는 못 이른 게 아닐까 싶고, 그래서 거시적인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개별 주체를 이해하는 더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고 보았습니다.
날씨
에티오피아에서 돌아온 후 첫 출근을 했던 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에티오피아 날씨를 궁금해하시더군요. 제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시점이 1월이었는데요. 1년 중에 비교적 가물고 더운 시기였던 것 같아요. 반팔에 바람막이 입으면 딱 좋은 느낌이랄까요. 일교차가 있는 편이라 입었다 벗었다 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월별 평균 기온을 보면 비교적 비슷한데요. 강우량 패턴을 보면 이 나라가 건기와 우기가 존재하는 나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르가체페의 사례를 보면 대략 4월에서 10월 정도에 강우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일반적으로 커피 꽃이 피는 시기는 본격적인 우기가 오기 전, 단기적으로 비가 집중해서 내리는 때인데요. 에티오피아의 경우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대략 3-4월 정도에 꽃이 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공
정확한 통계는 아닐 수 있지만 현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에티오피아 커피에서 내추럴이 70%, 워시드가 30%라고 보는 것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옆나라 케냐나 르완다가 워시드 위주의 가공을 하는 것과 사뭇 대비가 되지요. 왜 에티오피아는 워시드의 비중이 적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워시드 가공을 위한 물과 설비를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주요한 원인입니다.
실제로 이번에 방문한 가공소들 중에 아예 워시드를 하지 않는 곳이 꽤 있었습니다. 저희가 방문하는 곳은 어느 정도 고도화된 가공소임에도 그랬으니, 전국적으로 따지면 내추럴만 하는 비율이 훨씬 높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발효 탱크와 같은 설비는 돈이 드는 것이니 그렇다 쳐도, 비가 오는 기간과 양을 보면 에티오피아가 물 부족 국가라고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강우량만 따지면 한국보다 더 많은 지역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물이 부족한 것일까요? 정답은 상하수도 시설입니다. 우기에 확보한 물을 잘 보관하고, 정화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면 워시드 가공뿐만 아니라 산골에 거주하는 수많은 에티오피아 주민이 더 편리하게 물을 이용할 수 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가까이 있는 것이 탱크, 멀리 보이는 땅은 아프리칸 베드가 놓였던 곳
에티오피아 워시드에 대한 전 세계 스페셜티 커피 회사들의 높은 수요가 있고, 에티오피아 정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워시드 가공을 하면 높은 등급인 G1과 G2를 부여합니다. G1과 G2가 되면 더 높은 가격을 책정받게 되고, 수출도 용이하니 결과적으로 에티오피아 GDP에 기여를 하게 되겠지요.
이런 에티오피아 정부의 워시드 장려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물을 이용하여 가공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자본력 있는 생산자들은 물 대신 기계적으로 점액질을 제거하는 설비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수천만 원에 이르는 고가의 설비이기 때문에 극소수의 에티오피아 생산자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컵 오브 엑셀런스가 한 일
여러 가공소를 다니며 제가 눈여겨 본 것은 전통적인 내추럴과 워시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공된 커피였습니다. 같은 내추럴이지만 더 천천히 건조하는 슬로우 드라이(slow dry)를 포함해 허니와 무산소 내추럴 가공이 적용된 커피가 보였어요. 전체 생산량 중에는 작은 비중이겠지만, 그래도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가공 방식이 적용된 에티오피아 커피가 등장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게 느껴졌습니다.
비교적 보수적이고 전통을 고수하는 편인 에티오피아 생산자들에게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현지에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컵 오브 엑셀런스(Cup of Excellence, COE)가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1위를 수상한 생산자들의 커피가 얼마에 팔렸는지 찾아보니 2024년에는 한화로 2억 5천만 원, 2022년에는 6억 5천만 원 수준입니다(두 해의 파운드당 가격은 비슷한데 2022년 물량이 훨씬 많아서 액수가 더 큽니다). 아까 에티오피아 1인당 GDP가 1,272달러, 한화로 190만 원 정도였다는 걸 기억하신다면 COE 1위 수상이 생산자들에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2021 에티오피아 COE 1위를 거둔 타미루 타데세의 회사 ALO COFFEE의 오피스
물론 COE 1위를 거둔 커피들이 모두 새로운 가공 방식을 적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1위 수상을 통해 확보한 자본으로 다양한 가공 설비를 구비할 수 있고 인력을 채용할 수 있었겠죠. 1위가 누리는 결과물이 드라마틱하긴 하지만, COE에 입선한 30명의 생산자 모두 일반적인 커피 판매를 통해 누릴 수 없었던 수혜를 누렸을 것입니다. 에티오피아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COE가 해온 일이고, 적지 않은 수의 생산자들이 자극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커피 생산자들이 처한 어려움
현지에서 수출회사를 운영하시는 대표님을 만나 물었습니다. “현재 에티오피아 커피 업계가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대표님의 답은 ‘오래된 나무’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1970년대 초 에티오피아를 휩쓴 커피열매병(coffee berry disease) 때문에 커피 생산량이 급감했습니다. 그래서 1974년에 짐마농업연구소(JARC)에서 커피열매병에 저항력이 있는 품종을 선별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널리 알려진 74110, 74112와 같은 품종들이죠. 이 커피 품종이 각 산지에 배포된 것은 대략 1980년대 초이고, 현재 에티오피아 커피나무 중에 다수가 이때 심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수의 에티오피아 커피나무 수령이 40살을 넘었다는 뜻입니다.

짐마농업연구소(JARC). ©Kilimanjaro Specialty Coffees
커피나무는 수령이 많아도 여전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해가 지날수록 생산량과 품질이 떨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산자들이 하는 일이 가지치기(pruning)와 베어내기(stumping)입니다. 수령이 너무 많지 않으면 가지치기를 통해 오래된 가지를 제거하고, 수령이 많은 나무들은 아예 몸통의 일부만 남기고 베어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중 베어내기의 경우 단기적으로는 수확량이 급감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획기적으로 생산량이 늘어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다가올 1~2년의 수확량이 사라지니 당장의 소득원이 중요한 생산자들이 시도하기 어려운 맥락이 있었고 그렇게 45년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비영리기구인 테크노서브(Technoserve)는 영국의 생두 회사 팔콘(Falcon)과 함께 스텀핑 프로젝트(The Stumping Project)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농장의 4분의 1 영역 정도의 나무에 베어내기(stumping)를 진행함으로써 중장기적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프로젝트인데요. 이번에 테크노서브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프로젝트의 진행 현황에 대해 듣고, 실제로 베어내기를 진행한 커피와 아닌 커피를 비교해서 마셔보는 경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샘플이긴 했지만, 베어내기 진행한 나무에서 수확한 커피가 더 생동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오랜 시간과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이런 노력이 모여 결과적으로 에티오피아 커피 전체의 생산량과 품질에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테크노서브의 딜라(Dila) 오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