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데릭입니다.
지난 10월 31일, 오랜만에 Bb레터 독자님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커피 생활을 하고 계신지, 요즘 발행한 레터들은 어떻게 읽고 계신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설문으로 신청하신 분들을 커피하우스로 초대하고, 11월에 출시할 커피를 미리 마셔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 시간이었는데요. 밤에 마시는 커피 특유의 운치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어요. ‘오늘은 일찍 잠들지 못 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요.
밤 커피의 운치ⓒ 정아름 Joy
이날 어떤 분들이 오셨냐면요.
•퇴근길에 재밌어 보인다며 갑자기 합류한 Bb의 온라인 커뮤니티 매니저 베로
• 결 단골이라 베로를 알아보신, 중국과 대만 차를 좋아하시는 나진
• 커피 경험이 가장 적은 편이었지만, 커피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신 태리
• 아직 10대이던 2015년, 인천점에서 바리스타 패트릭을 만나 커피에 눈을 뜨신 동건
• 동남아 여행을 자주 다녀서 이 지역의 커피 경험이 많으신 순철
• 오늘의 모임을 준비한 마케터 조이와 데릭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중간에 오신 분들께 질문도 받았는데요. 모임이 끝난 후에도 머리를 맴도는 것들이 있었어요. 바로 태리님과 순철님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레터로 다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두 질문의 공통 키워드는 ‘산미’였고 질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랬습니다.
(태리) 저에게 대부분의 커피는 한약 같아요.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은 커피라고 하는 것 같은데 저한테는 대추차 같은 느낌이고요. 왜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은 커피라 하는지 궁금해요.
(순철) 친구들과 카페에 갔어요. 바리스타분이 산미가 있는 원두와 없는 원두를 구분해주시더라고요. 산미가 있다는 커피를 골라 마셨는데도 저는 산미가 잘 안 느껴졌는데, 같이 마신 친구들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산미가 있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스페셜티 커피의 본질을 꿰뚫는 좋은 질문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오늘 레터에서 조금 더 완전한 내용으로 답변을 드려보려고 해요. 어쩌면 아주 가벼운 내용은 아닐 수도 있겠는데요. 10분 정도 뭉텅이 시간이 있으실 때 읽어보시는 것을 권해 드리며, 한번 시작해 볼게요.
유리에 반사된 제 모습을 보고 흠칫 ⓒ정아름 Joy
산(acid)
첫 주제로 산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레터는 약간의 과학 지식을 담고 있는데 초반만 잘 넘기시면 아마... 괜찮으실 거예요. 화이팅!
산(acid)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염기(base)라는 게 있어요. 과학이 발전하면서 산과 염기에 대한 정의도 변화해 왔는데요. 크게 아래 세 가지의 정의가 있어요.
• 아레니우스: 물에 녹아 수소 이온(H⁺)을 내놓으면 산, 수산화 이온(OH⁻)을 내놓으면 염기.
• 브뢴스테드-로우리: 화학 반응에서 수소 이온을 주면 산, 수소 이온을 받으면 염기.
• 루이스: 화학 반응에서 비공유 전자쌍을 받으면 산, 비공유 전자쌍을 주면 염기.
조금 어렵죠. 가장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레니우스 정의인데 한계가 있어요. ‘물’에 녹이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커피는 물로 추출하는 음료이니 오늘 레터에서는 이해하기 쉬운 아레니우스 정의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물에 녹였을 때 수소 이온을 내놓는 것을 산이라고 이야기하겠다는 뜻이에요.
수용액 속 수소 이온의 농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pH가 있는데, 물의 pH가 7이고 물보다 산성(acidic)인 물질들은 pH가 7보다 낮습니다. 그래서 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물에 녹였을 때 pH가 7보다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산이 있는데요. 커피 맛에 기여하는 것으로 한정짓는다면 아래의 이름들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 구연산(citric acid): 오렌지나 레몬을 연상시키는 산미입니다.
• 말릭산(malic acid): 사과를 연상시키는 산미입니다.
• 주석산(tartaric acid): 포도를 연상시키는 산미입니다.
• 인산(phosphoric acid): 단독으로 과일이 잘 연상되진 않지만, 단맛과의 균형을 맞추는 식품 산미료로 종종 사용됩니다.
• 아세트산(acetic acid): 식초의 시큼함을 연상시키는 산미입니다. 주로 커피 발효 과정에서 효모와 박테리아 대사의 결과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미(acidity)
산미와 진화
인간이 산미를 정교하게 감지하게 된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진화론적 설명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것은 산미가 식품 안전성에 대한 판단을 도와주는 중요한 지표라는 것입니다. 산미가 지나치게 강한 음식이 몸에 안 좋은 물질을 함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설명인데요. 실제로 불쾌한 산미는 부패의 증거 중에 하나지요.
발효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도 시큼한 산미가 생기지만, 덜 익은 과일 또한 특유의 불편한 산미가 있습니다. 덜 익은 과일이 소화 장애 등 우리 몸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불쾌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종종 과일에서 기분 좋은 산미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비타민과 연결짓기도 합니다. 비타민은 우리 몸에 필수적이지만 음식이나 햇빛 등 외부 자극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영양소인데요. 우리의 미각 수용체가 비타민을 ‘맛’ 보지는 못 해도, 기분 좋은 산미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필수 영양소인 비타민 C의 존재를 추론한다는 설명입니다. 얼마나 근거 있는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긴 합니다.
이런 것들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미각 수용체가 ‘적절한 산미’를 잘 판단할 수 있도록 발달되어 온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잘 익은 과일을 먹었을 때 느껴지는 즐거운 산미는 ‘먹어도 된다’는 몸의 진단이 아닐까요. 부패했을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신 과일을 피하게 하고, 적절하게 잘 익은 과일을 골라 먹게 함으로써 인류의 생존을 도와온 것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산미와 단맛
센서리 훈련을 해보신 분이라면 물에 적정 농도의 시트릭 산이나 말릭 산을 타서 각각의 산미를 느껴보는 테스트를 해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과일을 연상시키는 산이라도 그것을 물에 타서 먹는 경험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실제 과일인 레몬의 즙을 내어 따로 마시는 경우와 거기에 적정량의 설탕과 탄산수를 넣어 레몬에이드로 만들었을 때의 감각의 차이를 떠올려보면 보통은 후자를 더 즐겁게 느끼시지 않을까 싶고요.
‘산미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또는 ‘산미가 있는 커피를 왜 좋다고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답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커피에 산미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맛을 내는 다른 물질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보통 이런 여러 가지 맛들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죠. 산미만 따로 분리하여 느끼는 것이 우리 몸으로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양의 산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어떤 다른 맛 성분을 갖고 있느냐가 산미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데, 레몬에이드의 사례로 보았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맛은 역시 단맛인 것 같습니다.
산미가 단맛에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단맛을 더 좋게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맛을 가리는 것인데요. 엄밀하게 구분하긴 어렵지만 산미가 얼마나 강한지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정 정도의 단맛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산미가 더해지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같은 정도의 단맛에 과한 양의 산미가 더해지면 산미 위주로 느껴지면서 단맛이 가려지는 경우도 있죠. 산미는 참 잘 써야 합니다.
산미와 쓴맛
개인적으로 단맛만큼 산미의 짝으로 자주 떠올리게 되는 맛은 아니지만, 쓴맛도 산미와 상호작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쓴맛이 산미에 가려져서 덜 느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은은한 쓴맛이 산미와 제법 잘 어울려서 나름의 매력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몽 같은 과일이 후자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산미의 정도가 적절하다는 전제 하에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산미가 있다는 것의 의미
어느 정도 산과 산미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슬슬 그날의 질문들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순철님의 질문 ‘산미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부터요.
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사실 산의 화학적 정의는 명쾌합니다. 물에 녹았을 때 수소 이온을 내놓아서 pH를 7보다 낮게 떨어뜨리면 산이니까요. ‘산미가 있다’는 것은 미각 수용체와 반응한 수소 이온의 농도가 역치를 초과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어요. 수소 이온의 농도가 높을수록 강한 산미를 느끼게 될 가능성이 높겠죠.
여기서 사람마다 감각의 역치가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미를 예민하게 느끼는데 오히려 둔감한 분들도 있죠. 쓴맛도 마찬가지입니다. 쓴맛에 대한 역치가 낮아서 유독 잘 느끼는 분들이 있는데 이들을 슈퍼 테이스터(super taster)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특정 용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산미를 유달리 잘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비교적 그런 편인 것 같고요.
이렇게 사람마다 감각의 역치가 다른데, 어떤 커피의 맛에 대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함께 테이스팅하다 보면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되거든요. 산미 뿐만 아니라 누가 쓴맛에 예민한지, 누가 특정 향을 잘 찾아내는지와 같은 정보를 얻게 돼요. 그러다 보면 자신의 감각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표본이 충분히 많아지면 전체 인구에서 본인의 감각이 대략 어느 지점에 해당하는지도 짐작해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산미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면 각 의견을 낸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인지 따져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산미가 잘 느껴진다'와 '나처럼 예민한 사람의 경우 산미가 꽤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는 같은 의견이지만 다른 의미로 전달되기도 합니다.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
빈브라더스 로스터리에서는 매주 새로운 커피를 찾기 위한 샘플 커핑을 합니다. 한번에 보통 10종에서 많게는 20종의 커피를 평가하는데요. 하나하나 자세히 평가하기 보다는 구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들을 빠르게 탈락시키는 작업을 먼저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한 저의 첫 번째 기준은 클린컵, 즉 커피에 있어서는 안 되는 불편한 향과 맛, 촉감이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고, 두 번째 기준은 좋은 산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산미는 단맛을 더 좋게 느끼게 하기도 하고, 어떤 유형의 쓴맛을 납득시키기도 합니다. 과일스러운 향의 커피라면 과일이 연상되는 산미가 함께 느껴질 때 인상적인 시너지가 생기고요. 좋은 산미는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커피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신상출시 편스토랑>이란 TV 프로그램 아세요? 거기 나오는 류수영님이 고추장찌개 레시피를 선보인 적이 있어요. 조리의 마지막에 식초를 조금 넣는 것이 '킥'이었는데, 따라해 보니 찌개에 식초를 넣기 전과 후에 인상적인 맛의 변화가 나타나더라고요. 이미 충분히 맛있는 고추장찌개였는데 식초 한 스푼으로 더 입에 당기고,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맛으로 변했던 것인데요.
저는 커피의 산미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산미가 부족한 커피는 마시기 편안하지만 제 입에는 왠지 심심하달까요. 어딘가 비어 있는 느낌이에요. 다음 모금을 재촉하는 힘도 약하게 느껴지고요. 과일스러운 산미가 적절한 강도로 있을 때 만들어지는 탄탄한 구조의 커피 향미를 경험하고 나면, 그게 부재한 커피에 대해서 못내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음식의 예를 들자면, 타코에 뿌리는 라임즙이나 사과잼에 더하는 레몬즙의 역할과도 결이 비슷한 느낌이에요. 없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산미가 커피 맛을 한 단계 올려주는 역할을 한달까요.
때로는 다채로운 산미의 커피를 많이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발견하게 되는 강배전 커피의 매력이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농담처럼 ‘식초단’과 ‘석탄단’으로 나누어 부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두 카테고리를 오가며 느끼게 되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둘 사이의 미디엄 로스팅이 주는 매력도 있고요. 그래서 커피의 세계를 계속 탐험하다보면 결국 커피 향미의 스펙트럼 전체를 즐기게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식초와 석탄을 오가는 재미는 한 쪽만 경험해서는 알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읽어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산미 이야기가 많이 길었네요. 태리님, 순철님, 오늘 레터가 그날 드린 설명보다 조금 더 나은 답변이었을까요? 흥미롭게도 두 분은 Bb레터를 구독하지 않으셨는데 우연한 계기로 모임에 오신 분들이셨어요. 이 레터를 보실지 여부도 확신할 수가 없지만,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 드립니다.
뉴스레터 산미를 좋아하는 이유<br>독자 모임에서 받은 두 가지 질문
컨트리뷰터 김민수 Derek
발행일 20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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