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 안녕하세요. 데릭입니다.
작년 여름, 콜롬비아 우일라 지역에 있는 로스 노갈레스 농장에 갔습니다. 농장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같이 투어하던 분들이 저기 멀리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냐고 물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라 모르겠다고 했는데 ‘가향 커피의 대가’라는 답변이 돌아오더군요. 바로 오늘 레터의 주인공인 엘 플라세르 농장의 세바스티안 라미레스(Sebastian Ramirez)입니다.
로스 노갈레스 농장에 막 도착한 순간. 아쉽게도 세바스티안은 렌즈 밖에 있었네요. ⓒ김민수Derek
로스 노갈레스 농장은 체계적인 가공 설비를 갖춘 농장입니다. 자체적인 디카페인 가공 시설을 갖고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세바스티안도 견학차 왔던 것이었죠. 다음날에는 세바스티안의 농장 엘 플라세르의 커피도 마셔볼 수 있었어요. 일반 커피도 있었고, 가향 커피도 있었습니다. 가향 커피를 맛본 후에 옆에 있던 세바스티안에게 어떻게 한 것인지 물었더니 핸드폰으로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해줬습니다. 왜 카투라 품종을 주로 쓰는지, 미생물 대사를 위한 영양분으로 무엇을 쓰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설명이 명확했습니다. 한창 가향 커피의 투명성이 이슈이던 시기라 이런 적극적인 설명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이때만 해도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최근에 엘 플라세르 농장의 생두를 한국에 수입하는 카페 노갈레스를 통해 어떤 제안을 받게 되었거든요. 세바스티안이 한국에서 고객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데 비즈니스 커핑보다는 조금 더 캐주얼한 맥락이었으면 한다고요. 그때 콜롬비아에서 세바스티안에게 가향 커피 프로세스 설명을 들었던 순간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고, 마침 8월에 엘 플라세르 농장의 커피를 두 개나 소개한 적이 있어서 우리 팀도 관심있어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엘 플라세르 농장의 커핑과 가공방식 세미나를 커피하우스에서 열게 되었습니다.
왼쪽부터 카페 노갈레스의 카를로스, 엘 플라세르의 세바스티안, 데릭, 로사 ⓒ정아름Joy
오늘 레터에서는 이날 세미나에서 세바스티안과 세미나 참석한 분들 사이에 오간 다양한 Q&A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30분으로 예정되어있던 Q&A 세션이 1시간을 훌쩍 넘을 정도로 열정적인 시간이었는데요.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는 과정이 있던 게 컸지만, 질문의 질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제가 사석에서 따로 여쭤본 질문들도 모아서 같이 들려드릴게요.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데릭 주. 질문은 참석자분들이, 대답은 세바스티안이 했습니다.)
농장 소개 부탁 드립니다.
엘 플라세르(El Placer)는 콜롬비아 킨디오(Quindio) 지역에 위치한 커피 농장이고, 제가 대를 이어 3대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농장 이름인 엘 플라세르는 영어로 ‘pleasure(기쁨)’라는 뜻이 있습니다.
킨디오는 콜롬비아의 대표적인 커피 산지인데, 요즘 현황이 어떤가요?
기후 변화 때문에 커피를 재배할 수 있는 면적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결과적으로 생산량도 많이 줄었습니다. 요즘은 관광업이 지역에 더 중요한 산업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엘 플라세르 농장에 가장 중요한 시장은 어디인가요?
가장 많은 생두를 구매하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가향 커피만 매년 4톤 정도 구매하는 로스터리도 있고, 가향이 아닌 커피만 구매하는 곳도 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시장은 유럽입니다. 면세 구역인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Belfast)를 기점으로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등에 위치한 유럽 로스터리에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카페 노갈레스를 통해 판매하고 있는데 이제 4년 정도 되었습니다.
한국에 오신 후에 카페들도 좀 다니셨나요?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1년에 한 달 정도 고객들이 있는 나라를 방문합니다. 이번에는 일본을 시작으로 한국을 거쳐 유럽에 다녀오는 일정인데요. 서울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로스팅 실력에 감탄합니다. 커피 품질로는 서울이 전세계에서 가장 앞선 도시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커피 가공 이야기를 해볼까요. 엘 플라세르 농장이 커피 가공에 있어 어떤 것들을 중요시하는지 알려주세요.
어떻게 가향하는지 궁금하시겠지만, 사실 가향 커피는 저희 농장 전체 생산량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일반 커피도 그만큼 생산하고 있습니다.
많은 농장들이 그렇듯이 엘 플라세르도 지속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공 과정에서의 물 사용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습윤한 콜롬비아 기후에 잘 맞는 워시드를 하지 않고 굳이 허니와 내추럴 가공을 많이 하는 것도 물 사용량을 줄이기 위한 노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원하는 컵 프로파일을 얻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고요.
가공 정보의 투명성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가향 커피를 생산하다 보니 가공방식에 관한 많은 질문을 받는데, 그럴 때마다 더욱 더 고객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엘 플라세르 농장의 커피 테이스팅 중. ⓒ정아름Joy
한국어로는 가향 커피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표현이 다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infused coffee’라고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co-fermented coffee’라는 표현이 들립니다. 엘 플라세르 커피는 어디에 해당하나요?
업계에서 아직 용어의 정의가 확립되지 않아서 ‘정확히 무엇이다’라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가공 방식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그 대답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중립적인 뉘앙스를 가진 ‘co-fermented coffee’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어떻게 가향 커피를 시작하게 되셨어요?
음료수를 마시다가 이런 선명한 향을 커피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더 좋은 품질의, 덜 인공적인 가향 커피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많은 고객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가향의 재료로는 무엇을 사용하세요?
우선 가향이 그렇게 단순한 프로세스가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발효 탱크에 멜론을 넣는다고 커피에 반드시 멜론 향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보다는 미생물의 대사에 필요한 당 성분을 추가하고, 그 대사의 결과물이 커피에 부가적인 향미를 내는 것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맛 보신 3종의 가향 커피들은 모두 특정 색깔을 잘 연상시키는 커피였습니다. 각각 빨강, 노랑, 보라였는데요. 빨강 커피는 딸기를, 노랑 커피는 패션 프룻을, 보라 커피는 포도를 발효 탱크에 넣은 경우입니다. 이 재료들과 함께 글루코오스, 효모를 적정량 배합하여 발효를 진행합니다.
그렇다면 가향 커피에 주로 사용하는 품종이 있나요?
일반적으로 콜롬비아에서 가향 커피에 주로 사용하는 품종은 카스티요(castillo)입니다. 커피 녹병에 저항력이 있어 생산성이 좋은 편이지만, 컵 프로파일의 매력이 높지 않아서 커피의 상품 가치를 올리는 방법으로 가향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엘 플라세르에서는 과거에 카투라를 가향 커피에 많이 사용했습니다. 카스티요보다 더 좋은 컵 프로파일을 갖고 있어서, 가향 후의 품질도 더 좋았기 때문이에요. 요즘에는 핑크 버번을 주력 품종으로 사용합니다. 좋은 품질의 커피를 사용할수록 가향의 결과도 더 좋아집니다. 오늘 커핑에서 맛보신 가향 커피의 클린컵이 좋았다면 커피 본연의 품질이 좋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 플라세르의 게이샤에서 굉장히 선명한 꽃 향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엘 플라세르 농장만의 특별한 가공방식이 있나요?
허니와 내추럴 가공을 모두 마치고 드라이 밀에서 파치먼트를 보관할 때 말린 귤 껍질을 함께 두면 커피의 꽃 향이 더 강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60일 정도 함께 보관하며 자연스럽게 향이 생두에 스며들게 합니다. 이러한 정보는 늘 고객에게 투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오늘 커핑 때 맛본 내추럴 커피의 발효 정도가 아주 적당하게 느껴졌습니다. 발효취도 느껴지지 않았고요. 과발효를 예방하는 엘 플라세르만의 노하우가 있나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정립된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커피 가공은 상당히 많은 변수가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끔씩 예상 외의 과발효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엄격히 변수를 통제함으로써 일관된 발효를 하려고 합니다.
꽤 많은 바리스타들이 엘 플라세르 농장의 커피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리스타 대회를 위해 적용하는 특별한 가공방식이 있나요?
개인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커피들이 대회를 위해 설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일반 고객들을 위해 저희 농장의 기준으로 생산한 커피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서 무척 기뻤습니다.
농장주로서 엘 플라세르의 커피를 다루는 바리스타들이 고객에게 꼭 건네주었으면 하는 이야기나 메시지가 있을까요?
바리스타 분들께 엘 플라세르의 커피가 선택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여러분이 다른 커피를 대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저희의 커피를 존중해 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오늘 엘 플라세르의 커피를 마시고, 세바스티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한국 방문하게 되면 또 어딘가에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필로그
이번에 엘 플라세르 세미나를 진행하며 다시 한번 느낀 것인데, 커피 생산자와 로스터, 바리스타의 만남에는 큰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유독 산지와 소비 시장이 멀리 떨어져 있는 커피 업계의 특성에 기인한 것인데, 이런 교류가 많아질수록 커피 업계가 더 발전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커뮤니티의 장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유용한 정보 교류를 통해 더 좋은 커피를 시장에 선보이는 교두보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돼요. 앞으로도 다양한 농장의 이야기를 커피하우스 프로그램과 레터로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참석자분들의 집중력이 느껴졌던 시간 ⓒ정아름Joy
여담입니다만, 8월에 이 농장의 커피를 판매할 때 농장 이름을 '엘 플라세'라고 표기했습니다. 작년에 콜롬비아에서 세바스티안이 분명 '엘 플라세'라고 했던 것 같은 기억 때문이었어요. 이번에 세바스티안을 만나서 다시 들어보니 엘 플라세 뒤에 약하게 'r' 발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엘 플라세르'라고 표기하려고 합니다. 커피 업계에서 스페인어는 영어만큼이나 중요한 언어인데요. 스페인어가 부족해서 농장 이름도 잘못 표기하고, 세바스티안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혹시 독자님들 중에 스페인어 관련 자문을 해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실까요? 오늘 레터 피드백에 남겨주시면 제가 따로 연락 드릴게요. 미리 감사 드립니다.
뉴스레터 기쁨의 가향 커피<br>엘 플라세르 농장주 세바스티안이 들려준 이야기
컨트리뷰터 김민수 Derek
발행일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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