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데릭입니다. 요즘 부쩍 추워진 느낌이네요. 다들 몸 잘 챙기고 계시죠?
제가 빈브라더스에서 하는 일 중 하나는, ‘제품 이름 정하기’입니다. 제가 직접 짓는 경우는 드물고, 다양한 의견을 모아 그중 좋은 것을 채택하는 식으로 이름을 정해요. 시즈널 블렌드 ‘개화’와 ‘휘게’ 또한 그렇게 지어졌지요. 둘 다 나름 고심해서 이름을 정했습니다.
드셔보셨나요? 2021년 첫 휘게 블렌드.©️빈브라더스
작년 말, 그러니까 두 번째 휘게 블렌드를 출시할 무렵, 여기저기서 ‘이름을 바꾸었으면 좋겠다’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한국에서 다분히 상업적인 속성을 지니게 된 ‘휘게’를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 아쉽고, 결과적으로 우리 브랜드 고유의 느낌이 부족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귀 기울여 들었고,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레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커피가 ‘휘게’라는 이름으로 출시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에게 주셨던 수많은 A/S 요청에 대한 답변이기도 해요. 과연 제가 여러분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휘게’를 위한 변명을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게요.
우리는 언제 이름을 지을까요? 자신의 이름을 짓는 사람은 극소수일 테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자녀나 반려동물의 이름을 짓는 경우입니다. 어렸을 때는 친구들의 별명도 열심히 지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빈브라더스처럼 닉네임을 사용하는 회사에 입사한다면, 자신의 이름을 지을 일이 생깁니다. 그 이름이 처음에는 입에 안 붙고 어색한데, 시간이 지나면 나도 모르는 새 자연스러워져요. 이름이라는 게 그런 것 같습니다.
이름 짓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까요? 이름을 정하는 주체와 이름의 주인이 누구/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듯합니다. 제 경우에 빈브라더스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데릭’은 가볍게 정했던 것 같은데, 고객에게 불릴 제품의 이름을 정할 때는 그것의 몇십 배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 같아요. 무척 어렵게 느낀다는 뜻입니다.
처음 팀에게 아이디어를 요청했던 블렌드 이름 공모. 이 블렌드는 5월의 ‘DEAR’가 됩니다.©️빈브라더스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제품은 특히 고민을 많이 하게 돼요. 저는 짧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편인데, 그중 최고봉은 이름 짓기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한두 단어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해야 하고, 한번 정하면 바꾸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좋은 이름은 논리적으로 접근될 때보다는 직관적으로 떠오를 때가 많아서, 가끔은 너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제가 이름 짓기에 관여한 사례 중, 비교적 좋은 평을 받았던 것은 ‘개화’ 블렌드입니다. 빈브라더스의 친구인 빈브로 박승근 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었는데요. 블렌드가 출시되는 3월과 잘 어울리고, 커피의 중요한 특징인 꽃 향이 잘 연상되어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부분 영어 이름인 우리 제품 라인에서 한국어 이름의 제품이 생겼다는 점도 좋았어요.
2022년 처음 소개된 개화 블렌드.©️빈브라더스 |
원두카드 뒷면을 승근님도 함께 장식해 주셨었지요.©️빈브라더스 |
왜 ‘휘게’라는 이름에 유독 A/S 요청이 많을까, 고민도 했었는데요. 어쩌면 빈브라더스를 대표하는 시즈널 블렌드로서 개화와 계속 비교될 수밖에 없는 게 휘게의 운명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겠지만요.
2021년 가을, (곧 휘게라는 이름을 갖게 될) 크리스마스 블렌드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이 본격화된 지 1년 정도 지났던 것 같아요. 금방 정리될 줄 알았던 상황이 길어지면서 피로감이 많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커피 업계에서 가장 피로감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현장 고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바리스타들이었을 것입니다. 저희 역시 매장을 찾아주신 고객에게 반가운 인사보다 QR 인증을 먼저 부탁해야 했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고객이 오실 때마다 어려운 실랑이를 벌여야 했던 시기였죠. 그런 상황을 하루에 몇 번씩 겪어야 하는 우리 팀원들의 마음이 괜찮을까 다들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QR 인증, 체온 측정, 손 소독제 같은 단어가 익숙하던 시기, 신도림점 풍경.©️빈브라더스
크리스마스 블렌드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로스터리에 모인 날, 그린 커피 바이어인 로사가 말했어요. 이 커피의 이름이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요. 모두가 힘들고 지치는 요즘, 이 커피와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모두에게 좋은 연말이었으면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어떤 단어가 우리의 이 마음을 잘 표현해 줄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휘게(Hygge)’라는 단어를 만났습니다. 지금도 로사가 휘게를 이야기했던 순간이 생생해요. ‘일상 속의 소소하지만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라는 뜻의 덴마크어 단어가 영어로는 ‘휴가’에 가깝게 발음된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커피에 우리의 소망을 담을 수 있다는 게 근사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에요. 그렇게 로스터 케이브가 만든 블렌드는 ‘휘게’가 되었습니다.
2년 전, 함께 첫 휘게 라떼를 맛보는 쿄쿄, 로사, 데릭, 케이브.©️빈브라더스
휘게 블렌드 출시 후 2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시달리던 우리의 삶에도 큰 변화가 있었어요. 먼저 2022년 4월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었고, 2023년 5월에는 세계보건기구가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해제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코로나19 종식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침내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왔음은 느낄 수 있었지요.
그동안 휘게 블렌드도 한 번 더 출시되었습니다. 2022년 12월에 출시된 두 번째 휘게는 케이브가 바랐던 대로 에티오피아로만 이루어진 블렌드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휘게는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의 조합이었는데요. 무산소 내추럴 콜롬비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해주긴 했지만, 케이브는 같은 가공 방식의 에티오피아를 쓰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어요. 그때는 케이브가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음 해에 세 가지 에티오피아를 재료로 한 두 번째 휘게를 마셔보니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같은 무산소 내추럴이어도 에티오피아가 잘 구현할 수 있는 향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2년, 에티오피아 블렌드의 매력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었던 두 번째 휘게.©️황요성Scene
올해 케이브가 준비한 것 역시 세 가지 에티오피아로 이루어진 블렌드입니다. 마셔보니 빨간 베리의 향미가 잘 떠올랐던 작년 휘게 블렌드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이번 블렌드는 빨간색도 떠오르지만, 검붉은색 과일도 잘 떠올라요. 진득하고 깊이 있는 느낌도 함께요. 원두카드에도 쓴 표현인데, 두 번째 휘게가 20대 젊은이의 느낌이라면, 이번 블렌드는 성숙한 어른의 커피 같습니다. 우아하고 품격있게 느껴져요.
위 문단을 유심히 읽으셨다면, 제가 이번 블렌드를 ‘휘게’라고 지칭하지 않았음을 눈치채셨을 거예요. 이 커피를 마시는 시점에 로사와 저는 아직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팀이 좋아하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 반, 이미 적지 않은 분들이 휘게를 기억해 주시는 상황에서 이름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 반이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해도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쩌면 이름 짓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이름 바꾸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맛보고 또 맛보고, 침묵과 고민이 길어지는 시간.©️박은실Momo
그러다 문득 로사가 처음 ‘휘게’라는 이름을 제안했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정확히는 그 이름에 담고 싶었던 따뜻하고 편안한 연말에 대한 소망을 떠올렸지요. 그리고 지난 두 번의 겨울이 어땠는지 되돌아보았습니다. 점점 편해지고 있긴 했지만, 코로나 시국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우리의 일상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었죠. 그렇다면 코로나를 보내고 처음 맞는 올겨울이야말로 ‘휘게’라는 이름이 빛을 발하는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년 전에 심은 씨앗이 드디어 꽃을 피우는 것이죠!
네, 이 정도면 집착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만큼 저는 로사가 2년 전에 휘게로 그렸던 그림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혼자서 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휘게를 마시며 따뜻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우리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요. 그래서 언젠가 빈브라더스 크리스마스 블렌드의 이름이 휘게가 아닌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올해만큼은 ‘휘게’로 출시하고 싶었습니다. 원두카드 앞장에 그려진 세 줄의 휘게는 세 번의 휘게를 의미하지만, 저에게는 세 번 만에 드디어 완성된 휘게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휘게, 휘게, 비로소 휘게.©️황요성Scene
휘게라는 이름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 올해 휘게가 정말 좋은 커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출시한 휘게 중, 제 취향에는 이번 버전이 제일 좋은데요. 세 번에 걸쳐 이 블렌드를 발전시켜 온 케이브와 팀의 성장이 느껴져서 더 감상적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해요. 잘 만든 커피인 만큼, 우리 팀 모두가 좋아하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었달까요.
그래도 올겨울을 담당할 이 블렌드의 이름은 ‘휘게’입니다. 빈브라더스 모든 매장에서 (어쩌면 말레이시아에서도) 에스프레소 메뉴로 판매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고요. 저는 이번 한 달 동안 휘게라는 이름을 곱씹으며 모처럼 찾아온 일상적인 연말을 만끽해 보려고 합니다. 과연 내년 빈브라더스 크리스마스 블렌드의 이름이 여전히 휘게일지, 아니면 새로운 이름일지도 기대해 주세요.
12월이 가까이 왔네요. 휘게를 마시며, 독자님의 12월에도 ‘일상 속의 소소하지만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가 이어지길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