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 안녕하셨나요? 에디터 모모입니다.
오늘은 ‘아마추어’라는 단어로 레터를 시작합니다. ‘아마추어(Amateur)’는 ‘애정’을 뜻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요. 아마추어는 전문성 없는 미숙한 존재가 아닌, 열렬한 사랑의 힘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되려 전문가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애정으로 해내는, 자발적이고 신비로운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BB레터 덕분에 온오프라인으로 독자분들을 만나며, 저는 이 아마추어가 가진 힘을 놀랍도록 느끼고 있어요. 커피를 업으로 하지 않지만, 그보다 더 진심으로 커피를 대하는 분들을 매번 만나기 때문인데요. 혼자 듣기 아쉬운 이야기들을 독자님께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 소중한 독자분들을 한 분 한 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주자로 BB레터의 애독자이신 기연님을 여러분께 소개할게요.
“편하게 기연이라고 불러주세요.” 합정점에서 만난 기연님.©️박은실Momo''
기연님. 합정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3월 커피챗에서 만난 이후 세 번째 만남이네요. 처음 만났을 때는 마냥 반가웠고, 두 번째 만났을 땐 친구 만나는 기분이었어요. 오늘도 휴가 내고 오신 건가요?
네, 반차 내고 왔어요. 휴가를 올리니 ‘또 커피 마시러 가요?’ 하시더라고요. 이제 다들 아세요.(웃음) 모모가 집 근처인 파주로 온다고 하셨는데, 합정점이 더 어울리는 공간인 것 같았어요. 둘에게 친숙하고, 대화하기 좋고요. 주말에 합정점에 오면 2층 저 자리가 거의 제 지정석이거든요.
모모와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나네요. 합정점 문을 열었는데 저를 반갑게 안아주셨잖아요. 두 번째 커피챗은 내향인인 저에게 용기가 필요한 자리였는데, 옆에 있겠다고 하셔서 든든했던 기억이 나요.
모모를 처음 만난 행사가 끝나고 그린 그림.©️기연
저도 그 만남들이 자연스럽고도 신기했어요. 기연님을 레터로 소개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했죠. 저도 기연님께 많이 배우고 있어서, 단순한 브랜드-고객 관계를 넘어서는 유대감을 담고 싶기도 했어요. 커피 브랜드 뉴스레터의 인터뷰 요청, 흔한 일은 아닌데 어떤 마음으로 오셨을지 궁금해요.
우선 설레고 기분 좋았죠. 모모에게 인터뷰 요청을 받자마자 바로 승낙했잖아요.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말하고요. 다들 ‘너를 인터뷰한다고?’ 이런 반응이었는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제 이야기가 뉴스레터에 실릴만할지 걱정이에요.
충분하죠. 저는 한 편으로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일 정도인데요. 오늘 자연스럽게 기연님의 커피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마 커피에 진심이신 독자분들도 집중하기 시작하셨을 거예요.
기연님의 인스타그램 피드 갈무리.©️기연
☕️기연님을 알게 된 건 빈브라더스가 2022년 초, 네이버 카페 홈바리스타클럽에서 공동 구매를 진행할 때였어요. 당시 기연님을 포함한 회원분들의 커피 사연을 BB레터에 소개하기도 했죠. 기연님이 콜드브루나 드립백을 직접 만들어 주변 분들에게 선물하신다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인스타그램에는 ‘기린다방’이라는 이름으로 홈 카페 사진을 올리시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신 것 같아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대체 뭐 하시는 분일까 하고요.
바리스타나 마케터 또는 커피 관련 일을 하실 거라 확신했었어요. 전혀 아니더라고요. 직장에 다니면서 홈 카페를 운영하는 게 가능한가요?
제 홈 카페 사진은 다 회사에서 찍은 거예요. 저는 네 명이 근무하는 세무사 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벌써 세무 직무로 12년 차네요. 커피 내린다고 사무실에 이것저것 갖다 놓으니, 저와 달리 깔끔하신 세무사님이 기물을 정리할 책장과 기다란 테이블을 사주셨어요. 덕분에 늘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죠. 유튜브에 영상을 올려서 ‘커피 내리는 세무사 사무실’이라고 홍보하라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진심이신 것 같아요.(웃음)
Bb와 함께한 사무실 카페의 기록들.©️기연 |
지난 여름, 트로피칼 블렌드를 라떼로.©️기연 |
카페가 아닌 사무실 카페였다니 반전이네요. 동료분들과도 커피를 나눠 드세요?
처음엔 고독하게 저만 커피를 마셨는데요. 옆자리 과장님이 가장 먼저 저에게 물드셨어요. 저가 커피만 드셨는데, 제가 드리는 걸 조금씩 맛보시더니 바뀌시더라고요. 추출할 때마다 권하면서 어떤 느낌인지 여쭤봤어요. 산미가 약간 있네, 꽃 향이 느껴지네 하시면 ‘그게 에티오피아의 특징 중 하나인데요’ 하면서 설명을 더했죠. 그다음에는 무산소 뉘앙스를 경험시켜 드리고요. 하나씩 핸드드립의 문턱을 넘어오시도록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커피를 마실 동료가 필요했어요. 매일 원두 분쇄하는 소음이 생기는데, 함께 커피를 내리면 서로 더 즐거워질 거 같았죠.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선에서 추출 도구를 사고 싶어 하셔서, 저가형 핸드 그라인더와 클레버 드리퍼를 추천했어요. 지금은 2년 넘게 스스로 내려 드세요. 원두를 살 때도 항상 물어보시죠. ‘기연 과장님, 여기서 제가 뭐 좋아할 것 같아요?’ 이러시면서.
또 한 분은 취향이 확고하세요. 신맛 하나도 없는 고소한 커피. 브라질이나 과테말라 커피를 드리면 좋아하세요. 평소에는 대용량 저가 커피에 시럽 세 번씩 눌러 드시는 분인데요. 재밌는 건 라떼나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드리면 시럽을 안 찾으세요. ‘기연 과장님이 내린 건 시럽 필요 없어요’ 하시죠. 최근에는 ‘이거 무산소네?’ 하시면서 자신이 서당 개라 풍월을 읊는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홈 카페에 물들지 않으실 거래요. 귀찮은 게 너무 싫다고.
☕ 기연님의 동료분들은 커피 복(?) 받으셨다고 느껴지다가도 원둣값이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괜찮으신지 여쭤봤더니 원두 부자라 괜찮다며 웃는 기연님. 원두는 농작물이라 매년 맛이 다르고, 같은 생두라도 로스터리마다 볶는 방식이 달라 새로운 원두를 자주 구매하신대요. 커피 향 가득한 기연님의 하루가 궁금해집니다.
하루의 커피는 언제 시작하세요?
9시 반에 출근하면 인사하고 바로 전기 포트에 물부터 올려요. 매일 정해진 동선이 딱 있죠. 제 자리 옆에 책장이 있어요. 드리퍼를 6개 정도 진열해 두었고, 그 옆에는 유리잔들을, 그 아래로 원두와 비품들을 정리해 놓았어요. 오늘 아침에는 ‘코스타리카 센트로아메리카노’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마셨어요. 점심 먹고 오면 또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고요.
기연님만의 작은 오피스 바.©️기연 |
사무실 책장에 한가득인 기물들.©️기연 |
점심에는 어떤 커피를 드세요?
주로 라떼를 마셔요. 프렌치프레스로 우유 거품을 만들고 컴프레소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서요. 작년에 취미로 라떼아트도 배웠어요. 냉장고에는 생강 시럽, 바닐라 시럽, 메이플 시럽 등 종류별 시럽이 있어요. 그날에 어울리는 라떼를 마시죠. 연유, 버터, 생크림도 있어요. 유제품을 조합해서 레시피 만드는 게 재밌더라고요.
오레그랏세라는 메뉴를 특히 좋아하는데요. 연유를 섞은 우유 위에 커피나 녹차 물을 얹어 층을 만들어 내는 음료에요. 크림 라떼도 좋아하는데, 쑥, 녹차, 딸기 등으로 크림을 만들어서 얹어 마시죠. 한동안 식물성 버터에 꽂혀서 마카다미아, 캐슈너트, 피스타치오 같은 견과류 버터를 크림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Bb의 볼리비아 솔 데라 마냐나에 흑임자 크림을 얹은 크림 라떼.©️기연
일하다가 졸리면 3시쯤 커피를 또 내리고, 퇴근 전에 한 잔 더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 퇴근해요. 하루에 4-5잔은 마시는 것 같아요. 퇴근하고 카페 가는 것까지 하면 7-8잔도 마시네요.
와, 카페인에 취약한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양이에요. 건강은 괜찮으세요? 카페인에 강하신가요?
카페인은 아무렇지 않아요. 다만 3년 정도 주기로 위가 고장 나더라고요. 그럴 땐 몸을 위해 6개월 정도는 하루 한 잔씩만 마셔요. 이제는 커피를 오랫동안 건강하게 마시는 게 목표에요. 커피 마시기 전에 꼭 밥 먹고요, 양배추즙이나 위장약도 챙겨 먹어요. 원래는 더 많이 마셨는데 줄인 거예요. 너무 많이 마신 날은 녹다운 되기도 했거든요. 기후 위기 때문에 2050년이면 커피를 못 마신다고 하는데, 그게 걱정이에요.
☕ 퇴근 후에도 주변 카페에 들르신다는 기연님. 이제는 사장님들과도 친해져서 새로운 메뉴를 같이 시음하거나 로스팅한 샘플 원두를 얻어오기도 하신대요. 내향인 맞나요…? 그러고 보니 기연님은 최근 빈브라더스 행사에도 종종 참석하셨어요. 먼 거리를 흔쾌히 와 주시는 기연님의 열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최근 빈브라더스에서 연 커뮤니티 프로그램들에 기연님이 자주 계셨어요.
돌아보니 다양한 경험을 했네요. 처음 참여한 건 작년 옥션 시리즈였어요. 바리스타 베로님께서 티그레&쿨레라는 커피로 코스를 제공해 주셨는데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바리스타 벨과 함께하는 센서리 클래스도 참석했었죠. 매달 빈브라더스의 새로운 싱글 오리진을 20g씩 모두 맛볼 수 있는 샘플러를 정기구독하는데요. 정기구독자를 대상으로 매달 클래스가 있더라고요.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후기를 남길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어요. 센서리 분야를 배워본 적이 없고 늘 혼자 기록만 하다 보니 객관적인 표현을 몰랐어요. 다른 분들은 통일된 범주 안에서 향미를 표현하시는데, 저는 ‘종이 향이 나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말한 거죠. 다른 분들이 느낀 걸 제가 못 느끼는 건지 표현이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거리감도 생기고 처음엔 주눅 들기도 했어요. 센서리 분야를 경험하고 배우면서 저를 객관화하는 좋은 기회였어요.
참여했던 BB 커피 프로그램들. 왼쪽부터 옥션 시리즈 테이스팅 코스, 클래스, 산지 토크, 커피챗.©️기연
연말 독자 모임과 커피챗 모임도 오셨었죠. 저는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입장이라, 감사하면서도 궁금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찾아와 주실까, 어떤 걸 누리고 가셨을까 하고요.
브라질 커피를 주제로 했던 독자 모임은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이었어요. 데릭이 브라질 산지 사진과 함께 알려주신 내용들을 메모장에 가득 적어두고 다시 복기하면서 정리했어요. 얼마 전 참석한 3월 커피챗에서도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는데요. 다들 말을 너무 수려하게 하시더라고요. 속으로 ‘우와’를 계속 외쳤어요. 어떻게 커피를 저렇게 표현하지? 어떻게 저렇게 넓게 생각하지? 다각도로 보신다, 너무 멋있다…이런 생각들이 가득했어요.
커피챗 모임을 마친 밤, 빠르게 적어 본 기록.©️기연
제가 워낙 내향인이라 처음에는 긴장했는데, 커피를 좋아한다는 게 통하니 편안하게 떠들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자연스럽게 소통의 장이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모르던 분들인데 끝나고 SNS에서 다 찾아 팔로우했어요. 세상에는 멋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 빈브라더스에 가면 다 만날 수 있다는 게 제 솔직한 생각이에요. 올 때마다 멋진 사람들만 있어서, 커피뿐 아니라 어디에 있든 진심인 사람들이 모인 카테고리의 브랜드랄까요.
지난달, 커피챗에서. 커피 기록 공개 중.©️정아름Joy |
왜인지 빵 터진 모모, 데릭, 기연.©️정아름Joy |
저는 기연님이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커피 이야기를 쏟아내시는데 ‘이분은 진짜구나’ 싶었거든요. 만난 김에, BB레터는 어떻게 읽으시는지도 슬쩍 여쭤볼까요?
레터는 수요일 4시에 열어보고 분량을 일단 확인해요. 짧으면 바로 읽고요. 분량이 길어서 사무실에서 못 읽을 정도면 닫고 집에서 다시 열어봐요. 읽다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체크해 두고 더 읽고 하면서 꼼꼼히 보는 편이에요. 아, 저 빈브라더스 아카이브도 정말 좋아해요. 커피에 관해 궁금한 게 생기면 검색해서 찾아봐요. 특히 커피위키는 이틀에 한 번씩은 보는 것 같아요. 모든 바리스타의 원두별 레시피를 올려주셔서 좋아요. 개인적으로 바리스타 아도이님의 레시피를 좋아하는데요. 친절하게 써주시는 느낌은 아닌데 늘 제 입맛에 딱 맞는 레시피를 올려주세요.
☕ 기연님은 빈브라더스의 커피 아카이브가 멋지다고 하셨지만, 기연님 개인 아카이브도 만만치 않습니다. 커피챗 모임에서 본인의 커피 아카이브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었거든요. 음료 사진뿐 아니라 원두 소비도 꼼꼼히 기록하고 계시더라고요.
성실히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은 늘 멋져 보여요. 기록에는 힘이 있잖아요. 언제부터 커피 기록을 남기셨어요?
고3 때부터 커피를 좋아했어요. 동네에 어머님들의 아지트 같은 카페가 있었거든요. 독서실의 자판기 커피와 다르다니. 이게 커피구나 했어요. 야간자율학습을 안 가고 거기를 들락거렸죠. 커피에 제대로 입문한 뒤로는 스타벅스 커스텀에 6년 정도 꽂혔어요. 시럽이나 샷, 크림 등을 조절해서 100개가 넘는 조합을 만들어봤죠. ‘스마트 오더’도 없던 시절이라 다 외워서 주문하던 때였거든요. 그때부터 기록이 시작되었어요.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은 데이터가 이제는 머릿속에도 있고, 블로그 비공개 글로도 가득해요. 다들 어떻게 그렇게 커피에 대해 잘 아냐고 물으시는데,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생각에 늘 부족함을 느끼고 민망해해요. 다만 비결이 있다면 ‘데이터’라고 말하죠. 나는 기억력이 안 좋고, 바리스타가 아니니까 자세히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데이터를 쌓게 했어요.
자기 결핍을 좋은 습관으로 바꿔내 강점으로 만드시다니, 큰 자극이 돼요. 기록은 주로 어디에 하세요?
원두를 사면 엑셀 파일로 정리해요. 항목은 다양한데요. 구매처, 로스터리, 원두 명, 국가, 농장, 생산자, 고도 같은 걸 써놔요. 생산한 로스터리에서 표기한 테이스팅 노트와 제가 느낀 노트도 비교해서 기록하죠. 가격도 적어두는데요. 소비자가와 용량, 1g당 얼마인지 계산해서 써요. 원두값이 오르는 것도 느끼지만 제가 원두에 얼마나 쓰고 있는지도 알 수 있죠.
엑셀에 정리된 원두 구입 리스트.©️기연
구매 날짜와 소진 날짜도 기록해요. 덮어놓고 사면 끝도 없이 사잖아요. 내가 원두를 어느 정도 소비할 수 있는지 염두에 두고 원두를 사는 거죠. 로스터리가 가까운 곳은 매장에 가서 먼저 마셔봐요. 구매할지, 경험한 걸로 만족할지 결정하죠. 사진은 인스타그램에 기본적으로 가볍게 올리고, 떠오르는 생각이나 정보는 메모장에 적어두었다가 검색해서 찾아요. 클래스나 커피챗처럼 특별한 경험은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시간 순서로 적고요. 비공개로 바꾸는 것도 많지만, 저를 위한 게 가장 크니까요.
누구보다 나를 위한 규칙이라는 게 건강하게 느껴지네요. 기록하면서 취향을 발견하실 것 같아요.
원래 단맛이 중심에 있고 산미가 조금 있는 커피를 좋아해요. 코스타리카나 엘살바도르 같은 커피요. 그런데 작년에 원두 연말정산을 해보니, 근 2년간 콜롬비아 원두를 많이 샀더라고요. 전에 데릭이 토크에서 ‘지난 몇 년간 콜롬비아 농장들에 무산소 발효에 대한 경험치가 많이 쌓인 것인지 요즘 품질이 좋더라’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딱 맞았어요. 콜롬비아 무산소 발효 커피가 구미를 당기게 하니 궁금해서 이것저것 샀거든요. 소비 취향이 커피 취향이 된다는 걸 느꼈어요. 궁금한 게 많은 성향에, 안정적으로 마시는 것보다 경험을 선택하는 소비가 커피 취향을 만든 거예요. 같은 생두를 다른 로스터리에서 경험하는 것도 좋아해요. 경험이 넓어지면 취향이 더 섬세해지니까요. ‘나는 어디 원산지를 좋아해’가 아니라 어떤 농장, 가공, 로스팅을 좋아한다는 선호까지 생기는 거죠. 이제 산지만으로 커피 취향을 말하기는 모호한 것 같아요.
☕ “이제 산지로 맛을 속단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BB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였는데, 고객으로 만난 기연님이 같은 이야기를 하셔서 놀랐어요. 이미 업계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깊고 빠르게 시장을 이해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자료를 공개하실 생각은 없나요? 많은 분과 나누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커피에 한창 빠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조금씩 커피 사진을 올렸었는데, 아니꼬워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코로나 이후로 홈 카페라는 용어가 대중화되었지, 그전에는 저 같은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도움이 되고 싶어 남긴 댓글에 ‘혹시 바리스타이신가요?’라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무시하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어요. 한번은 프렌차이즈 카페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을 올렸는데, 제 동의 없이 기사화됐어요. 항의 메일을 보냈더니 고소하려면 하라는 거예요. 선의로 한 일이 상처로 돌아오는 경험이 쌓이다 보니 비공개로 모두 돌리기도 했었어요.
근 3년 동안 주변 인간관계가 많이 바뀌었는데, 저를 좋은 시선으로 봐주시는 분들만 계셔서 이제 조금씩 다시 기록하고 공개해 보려고 해요. 팔로우가 조금씩 늘어나는 게 용기도 생기고요. 한 마케터분이 이끄시는 필사모임을 하고 있는데, 동기부여를 많이 받아요. 하지 않은 것에 도전해야 경험치가 올라간다는 것, 남들의 시선보다 나를 드러내는 방식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것 같은 관점을 얻죠.
합정점에서 대화 중인 기연과 모모. 촬영해 준 바리스타 다로 고마워요.©️김다현Daro
카페를 열고 싶진 않으세요?
정말 많이 받는 질문이에요. 카페를 열 생각은 전혀 없어요. 좋아하는 것과 경영은 다르니까요. 10년 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카페를 열면 보통 잘 되던 시기였잖아요. 지금은 카페 사장님이 모든 걸 잘해야 하더라고요. 커피뿐 아니라 다른 메뉴나 디저트, 마케팅, 디자인, 고객 관리까지. 그걸 다 잘하시는 사장님들이 너무 많아요. 커피 관련 콘텐츠는 더 시도하고 싶긴 하지만, 카페 관련 일을 하게 된다면 서포트하는 역할이나 취미 생활의 경계에서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안주하는 걸 좋아해서 지금 세무 관련 일이 잘 맞아요.
커피 외에도 몰입하시는 게 있나요? 소위 ‘덕후 기질’이 다른 곳에도 발휘되는지 궁금해요. 커피를 좋아하시는 분 중에 술이나 베이커리에 관심 있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알코올에 약해서 많이 마시진 않는데, 최근 가까운 카페에서 술로 월간 시음회를 한다고 하셔서 갔었어요. 원두 노트에 술이 있는 게 궁금한 적이 많았거든요. 다양한 술을 조금씩 맛봤는데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라 여기저기 소문냈어요. 베이커리도 한동안 미쳐있었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멈춘 상태예요.
요즘 꽂혀있는 게 있다면 독서예요. 마케팅, 브랜딩에 관심이 생겨서 관련 책을 여러 권 읽고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스타그램에서 에디터잖아요. 에디터의 면모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유튜브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니 시각이 좁아지더라고요. 책을 잔뜩 사 읽으면서 제 SNS에 어떻게 적용할지 상상해 봐요. 좋은 문구는 필사하거나 그림으로도 남기죠.
좋아하는 인덱스 스티커를 붙여가며 요즘 읽는 책. ⟪JOBS - EDITOR (잡스 - 에디터)⟫, 매거진 ⟪B⟫ 편집부 지음.©️박은실Momo
☕ 기연님의 책 곳곳에 표시된 곳을 따라 기연님의 생각을 엿봅니다. 꼼꼼하게 붙은 스티커처럼, 홀로 있는 시간의 흔적이 정갈하고 맑게 느껴지네요. 기연님과 쉴 틈 없이 떠들고 나니 벌써 밖이 어둑해졌습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보슬비가 조금씩 날리는 것 같아요. 늦기 전에 어서 보내드리기로 합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기연님에게 커피란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어요.
생활의 활력. 한동안 출근하기 싫은 시기가 있었어요. 그래도 추출 기구가 다 사무실에 있으니까 갈 기분이 나더라고요. 맛있는 무슨 원두가 사무실 어디에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출근했어요. 사무실에 원두 택배 오니까 월요일에 받으러 간다는 생각으로 출근하고요. 일상에 생기를 주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저를 더 발전시키는 존재예요.
기연님, 오늘 소중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려요. 우리 또 봐요. 제 우산 가져가실래요?
아니에요! 역까지 바로 뛰어갈래요. 저도 오늘 정말 편하고 재미있었어요. 좋은 기회로 또 반갑게 만나요, 모모.
소셜미디어와 브이로그의 시대, 보여주고 보는 데 익숙해지느라 홀로 고요히 깊어지는 법을 잊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기연님의 커피 역사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재밌고, 알아주는 이를 만나면 더없이 기쁜, 단단한 시간이 쌓여있습니다. 전문가의 타이틀이 없이도 깊고 높게 커피 세계를 꾸려온 기연님이 빛납니다. 좋은 뉴스레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아마추어가 되어 이 일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도 얻네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린 기연님과의 만남, 어떠셨나요?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셨다면, 곧 저를 만나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피드백 버튼으로 독자님이 가지고 계신 커피에 대한 아마추어적인 생각도 나눠주시면, 기연님도 저도 더없이 기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