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모모입니다. 연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을 키보드 옆에 두고 첫 레터를 띄웁니다.
로스터리 생활에 적응하다 보니 일하기 전 커피를 내리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어요. 한 잔의 커피 안에 로스터리 팀의 애환이 담겨 있다는 걸 안 뒤로는 커피 맛이 왠지 더 진하게 느껴지는 듯 합니다.
이 커피잔 속에는 다른 이들의 삶 또한 녹아 있습니다. 바로 커피 농사를 짓는 지구 반대편의 농부들입니다. 커피 수확이 한창인 지금, 그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요? 오늘은 코스타리카의 여성 소농을 위해 비영리 단체 '빈 보야지(bean voyage)'를 운영하시는 탁승희 대표님이 전해주시는 산지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레터를 읽으신 뒤에 만나는 커피는 좀 더 진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커피 수확기, 농부 에리카의 하루
written by 탁승희
현재 많은 산지에서 커피 수확이 한창입니다. 커피 수확기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일 년에 수확을 두 번 하는 콜롬비아를 제외하고는 보통 일 년에 3개월 정도 바쁜 수확기를 보냅니다. 커피 열매 가공뿐 아니라 때때로 수출까지 맡아 하는 농장인 경우, ‘수확기’의 기운이 5-6개월 정도 이어집니다.
오늘은 코스타리카 작은 농가에선 수확기에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이야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속한 '빈 보야지'의 파트너인 농부 에리카의 일상 속으로 따라와 주세요.
가족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에리카. ⓒ박은실Momo
🕓 5:00 AM 기상
경쾌한 알람이 울린다. 에리카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가장 먼저 부엌으로 간다. 스토브 안에 땔감을 넣고 성냥으로 불을 켠다. 물이 가득한 주전자를 스토브 위에 올리고 어제 만들어 놓은 가요삔또*도 냄비 가득 넣어 스토브 위에 올린다. 물이 끓고 가요삔또가 데워지면 달걀 프라이 다섯 개와 함께 그릇에 담는다. 수저 놓는 소리와 함께 남편 루벤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고, 세 명의 딸도 부엌으로 나와 에리카를 돕는다.
📌 가요삔또(gallo pinto) | 검은콩과 향신료를 넣어 볶은 밥. 주로 아침에 먹는 코스타리카 전통 음식
🕟 5:30 AM 아침 식사와 하루 시작 준비
커피는 남편 루벤이 초레아도르*를 사용하여 내린다. 잠이 깬 딸들의 조잘거림과 함께 하루가 시작된다.
📌 초레아도르(chorreador) | 코스타리카 대부분의 농가에서 사용하는 ‘융드립'을 닮은 천으로 만들어진 커피 필터
초레아도르로 커피를 내리는 남편 루벤. ⓒ박은실Momo
에리카가 뒷정리를 시작하면 다들 농장에 갈 채비를 한다. 부츠를 신고, 살이 노출되지 않게 토시와 모자를 쓰고 손수건을 목 뒤로 두른다. 12월, 코스타리카의 건기에는 해도 유난히 뜨거워서 노출되는 곳을 최소화해야 한다. 얼굴에는 선크림도 꼼꼼히 바른다. 마지막으로 까나스타*를 허리에 두른다. 그리고 농장으로 가기 위해 루벤이 운전하는 트럭 뒤에 다 같이 올라탄다.
📌 까나스타(canasta) | 플라스틱 혹은 건조된 잎으로 만들어진 바구니
까나스타를 허리에 두르면 농장 갈 채비 끝. ⓒ박은실Momo
🕕 6:00 AM 수확 시작
트럭을 농장 입구 언덕에 주차하고 아침 이슬이 몽글몽글 맺힌 잎사귀 사이를 지나 언덕을 내려간다. 나무줄기에는 빨갛게 익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일 년의 고생을 보답 받는 기분마저 든다. 에리카 가족은 3헥타르의 작은 농장을 운영하는데 가족 모두가 수확에 참여해도 열매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다 수확하기가 힘들어 매년 커피를 업으로 하지 않는 친척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농장에 도착하니 미리 부탁해 두었던 친척들이 도착해 있다.
에리카의 셋째 딸 따티아나(왼쪽)와 커피 농장에서. ⓒ탁승희
한 사람당 하나의 까예*를 선택해 수확을 시작한다. 에리카와 루벤이 관리하는 농장은 꽤 정리가 잘된 편이라 커피나무들이 한 줄로 나 있다.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다. 이전에 루벤의 부모님이 관리하시던 이 농장은 들쑥날쑥 나무가 자라 수확기에 특히 어려움을 겪었다. 포도와 다르게 커피 열매는 한 줄기에 난 열매들이 한 번에 다 익는 것이 아니기에 익은 한 알, 한 알을 손으로 수확해야 한다. 한 번 보았던 나무도 며칠 후, 혹은 몇 주 후 다시 보고 익은 열매만 따야 한다. 커피나무가 들쑥날쑥 나 있는 농장에서는 효율적인 수확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루벤과 에리카는 농장 관리를 시작하면서 나이 많은 나무들을 손보고 줄을 맞추어 농장 전체를 정리했다.
📌 까예(calle) | 농장에 정돈된 나무들 사이에 만들진 길
각자 한 까예씩 맡으면 수확이 수월해진다. ⓒ박은실Momo
허리에 매고 있는 바구니가 가득 찰 때까지 계속해서 빨갛게 익은 열매를 한 알씩 딴다. 줄기 가득 열린 열매를 한 번에 주르륵 쓸어 따면 운이 좋다- 라고 노래를 부른다. 사실 열매가 모두 익는 것은 집중 수확기에도 항상 있는 일은 아니다. 까나스타가 가득 차면 언덕 위로 올라가 미리 들고 온 포대에 커피 열매를 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가족이 운영하는 에리카네 농장은 아주 까다롭게 관리하진 않지만 보통 픽커들을 고용하는 농장에서는 포대가 섞이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한다. 커피 체리 수확량에 따라 하루 일당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며 수확을 하는 날은 시간이 빠르게 간다. ⓒ박은실Momo
🕥 10:30 AM 점심
아침을 일찍 시작했기에 농장의 점심시간도 이르다. 큰딸 마리크루스가 큰 소리로 “점심!” 이라고 외치면 하나둘 가득 찬 까나스타를 허리에 매고 언덕을 오른다. 농장 위쪽 언덕에는 나이가 많은 큰 나무가 있는데 그 그늘은 농장에 있는 모두를 위한 휴식과 식사의 공간이다. 에리카가 아침에 싸 온 점심을 모두에게 건넨다. 점심은 바나나 잎에 싸인 알무엘조 데 까페탈(almuerzo de cafetal). 에리카가 직접 만든 옥수수 토르티야와 밥, 콩, 기름에 튀기듯 구운 플란테인* 그리고 달걀 프라이가 담겨 있다. 수확기 내내 조금씩 바뀌지만, 커피 수확기에 특별히 먹는 이 전통음식은 가족 모두가 즐기는 메뉴다.
📌 플란테인(plantain) | 바나나과의 열매, 바나나와 다르게 꼭 익혀 먹는다
토르티야와 다양한 음식을 바나나 잎에 싼 커피 농장의 점심 알무엘조 데 까페탈. ⓒ박은실Momo
식사 후 다시 각자 위치의 까예로 복귀한다. 둘째 딸 라켈의 주도로 노래는 계속된다.
🕝 2:30 PM 수확량 측정
무더움이 살짝 가시고 농장에 그늘이 들 때쯤, 루벤은 큰 소리로 “오늘은 이만!”이라고 외친다. 루벤의 신호와 함께 농장 위에 세워 둔 트럭 주위에서 수확량 측정이 시작된다. 산지마다 측정 방식은 다르지만, 코스타리카에서는 부피로 수확량을 측정한다. 까후엘라(cajuela)라는 쇠로 만들어진 상자를 이용해 일꾼의 하루 임금을 계산한다. 세 딸의 수확기 용돈도 이렇게 측정되기에 딸 셋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자신이 수확한 열매가 가득한 포대 옆에 선다. 한 까후엘라는 보통 10~12킬로그램의 커피 체리가 들어간다. 측정하는 내내 음에 맞춰 숫자를 센다. 막내딸 따티아나의 역할은 공책에 모든 사람의 수확량을 기록하는 것. 매의 눈으로 숫자를 놓치지 않는다. 루벤이 트럭으로 힘껏 부은 마지막 까후엘라와 함께 오늘 하루 수확된 모든 커피가 트럭 뒤에 실렸다. 오늘의 일등은, 빠르게 움직여 20까후엘라를 수확한 마리크루스!
까후엘라에 커피 체리를 담아 임금을 계산한다. ⓒ탁승희
🕞 3:30 PM 수확끝, 프로세싱 시작
에리카와 루벤은 마이크로 밀을 운영한다. 루벤은 농장을 관리하고 에리카는 마이크로 밀을 관리하고 운영한다. 사이즈가 작아서 가족들은 ‘나노-마이크로 밀’이 아니냐고 농담을 나누며 트럭을 몰아 집 뒷마당에 있는 마이크로 밀에 도착한다. 에리카가 관리하는 마이크로 밀은 수확기를 맞아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타일로 감싸진 수조 위에 있는 파네가로 가공될 열매의 부피를 잰다. 한 파네가에는 까후엘라 20개 양의 커피 열매가 들어가고, 한 파네가가 가공돼서 건조되면 한 낀딸(quintal)의 생두가 된다. 1낀딸은 코스타리카 농부들이 사용하는 45~46킬로그램의 커피 생두 거래 단위다. 오늘 하루 가족들은 5.5파네가(약 1,100킬로그램)를 수확하고 가공한다.
📌 마이크로 밀(Micro mill) | 농장에서 직접 운영하는 소규모의 커피열매 가공시설
📌 파네가(fanega) | 직사각형의 쇠로 만들어진 커피 부피를 재는 도구
부피를 재기 위해 파네가에 커피 열매를 담는 중. ⓒ박은실Momo
트럭의 뒷부분에는 커피 열매를 내보낼 수 있는 조그만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어 파네가를 채우고, 수조에 물을 채운다. 수조의 밑 부분은 열매의 껍질과 과육을 제거할 펄퍼가 있다. 물이 가득한 수조에서 먼저 가벼운 열매들이 떠오른다. 그 열매들을 제거하고 수조 안 펄퍼로 가는 파이프 쪽 문을 열면, 파이프 안의 장애물에 의해 돌과 나뭇가지 같은 불순물이 일차로 제거된다.
펄퍼를 확인하는 에리카와 커피 씨앗을 옮기는 딸들 ⓒCafe EyF
에리카의 가족들은 몇 년 전부터 허니 프로세싱을 주로 했다. 펄퍼 앞에서 에리카는 과육과 껍질이 제대로 제거돼 나오는지 확인하고 라켈과 따티아나는 펄퍼 밑에서 껍질이 벗겨진 채 과육에 감싸져 있는 커피 씨앗을 드라잉 베드*로 옮긴다. 몇 년째 해온 듀오라 손발이 척척 맞아 한 명이 커피 씨앗이 가득한 바구니를 드라잉 베드로 옮기면 다른 한 명은 빈 바구니를 펄퍼 밑으로 옮긴다. 이렇게 5.5파네가의 커피 열매가 가공을 거쳐 건조대로 옮겨질 때쯤 해가 지기 시작한다.
📌 드라잉 베드 | 커피씨앗을 균일하게 건조시키기 위한 시설. 지면에서 떨어져 있는 모기장 같은 망이 공기 순환을 돕는다.
루벤과 에리카는 내일의 수확을 위해 수조를 씻고 펄퍼와 파이프를 씻는다. 그사이 세 딸은 드라잉 베드의 커피 씨앗을 얇고 넓게 편다.
드라잉 베드에 커피 씨앗 펼치기.ⓒ박은실Momo
뭉쳐있는 부분엔 곰팡이가 생길 수 있어 잘 뒤집어 주고 밤낮의 온도 차를 고려해 비닐 커버를 덮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해질녘 드라잉 베드에 비닐을 씌우는 따티아나. ⓒ탁승희
🕟 6:30 PM 하루의 마무리
해가 지고 어느새 모든 일이 끝나간다. 루벤은 제거된 과육을 다시 트럭에 싣는다. 과육을 뒷마당에 그대로 두면 발효되는 냄새가 고약해 밤새 뒤척일 게 분명하다. 게다가 이 과육은 둘도 없는 비료 역할을 한다. 피곤하지만 바로 다시 농장으로 가서 토양에 뿌리는 것이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일석이조이다. 라켈도 루벤을 돕기 위해 트럭에 올라탄다.
제거된 과육을 농장 토양에 뿌리러 가는 라켈과 루벤. ⓒ박은실Momo
에리카는 얼른 샤워를 마치고 두 딸이 씻는 동안 저녁상을 차린다. 루벤과 라켈도 돌아와 씻고 부엌으로 옹기종기 모인다. 하루 동안 농장에서 봤던 새와 곤충, 불렀던 노래 등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배가 부른 가족들은 하나둘 침대로 향한다. 8시가 넘어서야 에리카는 부엌을 치우고 내일 아침과 점심 식사를 준비한다.
🕘 9:00 PM 꿈나라로
닫힌 딸들의 방문 뒤로 불이 꺼진다. 에리카도 이제 침대에 눕는다. 오늘도 긴 하루였다. 내일의 이른 시작을 위해서 이만 자야 한다며 눈을 감는다.
에리카 가족. ⓒCafe EyF
👨🌾 빈 보야지(Bean Voyage)
코스타리카의 커피농업에 종사하는 소작농 여성의 환경 개선에 앞장서고 있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소작농 여성의 높은 빈곤율을 줄이고 여성 농부들이 독립적으로 커피를 생산할 수 있도록 교육 및 활동을 지원하여 여성과 지역 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