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브라더스 로스터리팀은 매주 모여 미팅을 합니다. 보통은 로스터리에서 하는데 얼마 전에는 근처에 있는 CoSMo40에서 미팅을 했어요. 새로운 미팅 장소라서 그런지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큰 주제의 이야기들도 하게 되더라고요. 한참 올해 출시한 시즈널 블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로스터 케이브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 "올해 출시한 시즈널 블렌드들에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시즈널 블렌드'는 특정 기간에만 판매하는 커피 블렌드를 의미합니다. 같은 블렌드지만 1년 내내 판매하는 블랙수트나 벨벳화이트 같은 '시그니처 블렌드'와는 성격이 다르고, 한시적으로 판매하지만 나라와 농장이 강조되는 싱글 오리진 커피와도 카테고리가 다르죠.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 머릿속에 이렇다 할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올해처럼 잦은 빈도로 시즈널 블렌드를 출시한 것은 빈브라더스 런칭 첫해인 2013년 이후로 처음이긴 해요. 그냥 싱글 오리진 커피를 하나 더 출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왜 시즈널 블렌드를 만들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올해 출시한 시즈널 블렌드 중 두 개를 골라 리뷰해보려고 합니다. 과연 이 레터가 끝날 무렵에는 그럴 듯한 답을 찾게 될까요 아니면 '열심히 만들긴 했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까요. 여러분과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올해 첫 시즈널 블렌드, 우분투입니다.
우분투 UBUNTU
'우분투'는 빈브라더스 8주년을 기념했던 블렌드입니다. 빈브라더스 브랜드를 기념하는 블렌드였던 만큼 재료 선정에도 힘을 많이 주었지요. 그 당시 우리가 갖고 있던 가장 좋은 재료들을 선정하여 블렌드로 만들었어요. 단독으로 출시되었을 때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싱글오리진 커피들이었습니다.
우분투 원두카드
🇪🇹 에티오피아 시다마 하마쇼 워시드
🇧🇷 브라질 리우 브리얀테 아라모사 더블 퍼멘테이션
🇨🇴 콜롬비아 미카바 게이샤 내추럴
🇨🇴 콜롬비아 미카바 티에라 내추럴
이 블렌드가 출시되었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아마도 '우분투'라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영어도 아닌 것 같고, 굉장히 낯설게 들리는 단어죠. 도대체 무슨 뜻이길래 이 블렌드의 이름이 되었을까요.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우분투'라는 개념을 세상에 알린 데즈먼드 투투Desmond Mpilo Tutu의 말을 아래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격언 중에는 우분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지요.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우분투의 핵심입니다. 우분투는 우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홀로 떨어져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우분투라는 자질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관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개인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서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세상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이 번져 나가 다른 곳에서도 좋은 일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 전체를 위하는 일이 됩니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공회 대주교, 데즈먼드 투투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된다(A person is a person through other people)'고 말하는 우분투 철학은 실제로 팀을 강조하는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프로그램 <플레이북: 게임의 법칙 - 경기의 규칙, 인생의 규칙>을 보면 NBA 농구팀 '보스턴 셀틱스'의 감독 닥 리버스가 우분투를 언급하는 장면이 나와요. 자아가 강한 당대의 슈퍼스타들로 구성되었던 보스턴 셀틱스가 어떻게 하나의 훌륭한 팀이 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데, 팀으로 일하는 것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보실 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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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북: 게임의 법칙>, "닥 리버스: 경기의 규칙, 인생의 규칙"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라는 로스터리팀의 커피 설명을 듣고 디디는 '우분투'라는 이름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하나가 다 좋은 커피였는데, 블렌드로 만들고 보니 각각을 따로 마실 때는 경험할 수 없었던 훌륭함을 경험할 수 있었죠.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농구팀이었던 보스턴 셀틱스와 나란히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좋은 커피들이 모여 훌륭한 팀을 이뤘다는 점에서 맥락이 닿아있는 느낌입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블렌드 재료의 가짓수가 많아서였는지, 마실 때마다 커피의 뉘앙스가 조금씩 달랐던 거였어요. 어떤 컵에는 게이샤가 많이 들어가고, 어떤 컵에는 브라질이 좀 더 들어간 느낌이랄까요. 커피를 내릴 때마다 내가 경험한 베스트컵이 나와주기를 바라는 일이 나름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관된 품질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보스턴 셀틱스도 어떤 경기에선 평소보다 아쉬운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위안해보며 다음 시즈널 블렌드 디어로 넘어가볼게요.
디어 DEAR
디어Dear는 '코스타리카 내추럴'을 주재료로 하고 페루와 에티오피아 커피를 더해 만든 블렌드입니다. 이 커피를 5월에 출시하기로 결정하고 어떤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지 고민을 했었는데요. 5월이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게 되는 시기인 점에 착안해 바리스타 루나가 디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영어로 편지를 쓸 때 처음 쓰게 되는 말이 디어(Dear)이기도 해서 원두카드의 앞면 아트워크로 편지지가 들어가게 되었죠.
디어 원두카드
이 원두카드의 앞면을 보고 '실제로 여기에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한 팀원이 있었습니다. 왼쪽 아래에 있던 DEAR를 위로 올리고 그 옆에 누군가의 이름을 써서 엽서처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거예요. 이 아이디어가 확장되어 빈브라더스 모든 매장에서 디어를 주문하시는 고객들에게 바리스타들이 손편지를 쓰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죠. 아래는 빈브라더스 신도림팀과 합정팀이 썼던 디어 카드입니다.
빈브라더스 신도림팀의 디어카드 |
빈브라더스 합정팀의 디어카드 |
여기저기 뒤져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신도림팀과 합정팀의 카드만 찾을 수가 있었는데요. 그 당시 고객들이 받으셨을 모든 디어 카드를 모아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혹시 아직 디어 카드를 보관 중인 독자분 계신가요? 제보 부탁드립니다. 누구의 카드를 갖고 계실지 궁금하고 그 사실을 카드의 발신인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요.
제가 이 이벤트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일상성과 가벼움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각잡고 힘주어 쓴 손편지도 좋지요. 그 임팩트는 훨씬 클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주 하기는 어렵겠죠. 저는 가볍고 부담없는 디어 카드가 '일상 음료'인 커피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소소하지만 편안한 일상의 즐거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시즈널 블렌드는 왜 만드는 걸까요?
이제 어느덧 레터 서두에 나왔던 질문에 답할 시간입니다. 그래서 시즈널 블렌드는 왜 만드는 걸까요? 이번에 올해 시즈널 블렌드를 리뷰하며 저는 오히려 우리의 시그니처 블렌드와 싱글 오리진 커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빈브라더스의 시그니처 블렌드는 블랙수트, 벨벳화이트 그리고 몰트입니다. 빈브라더스팀과 고객들이 가장 잘 아는 커피죠. 시그니처 블렌드는 1년 내내 일관된 맛을 내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기에 생두와 로스팅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에도 팀과 고객 모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가장 보수적으로 접근하게 되는 커피라고 할 수 있어요.
싱글 오리진 커피는 어떠한가요. 커피가 수확되고 발효와 건조 가공이 완료된 시점이면 이미 커피품질의 많은 부분이 결정된 상태입니다. 로스팅과 추출이라는 중요한 단계가 아직 남아있지만, 싱글 오리진 커피의 로스팅과 추출은 주로 산지에서 설계된 커피 품질을 잘 구현하는 기능을 하고 있지요. 자연스럽게 싱글 오리진 커피를 판매할 때는 로스터리보다는 생산자의 목소리를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커피를 설계한 생산자가 주인공이라는 뜻입니다.
시즈널 블렌드는 위 두 가지 카테고리의 커피들과 다른 길을 갑니다. 시그니처 블렌드처럼 엄숙할 필요가 없고, 싱글 오리진 커피처럼 산지의 신성함에 얽매일 필요가 없죠. 시즈널 블렌드는 자유롭습니다. 어떤 커피라도 재료가 될 수 있고, 어떻게 로스팅해도 괜찮습니다. 맛만 있다면요. 만약 커피의 결과 잘 맞는다면 어떤 이름과 스토리든지 붙여줄 수 있습니다. 그게 우분투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팀의 모습이든, 아니면 고객과 손편지라는 색다른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싶은 마음이든지 간에요.
저에게 시즈널 블렌드는 '커피하는 사람들과 고객들이 가끔 만나서 하는 놀이' 같은 느낌입니다. 어떤 날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재밌었다 생각하겠지만, 또 어떤 날에는 괜히 놀았나 싶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자주 만나서 놀다보면 다음 번에는 조금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다음 시즈널 블렌드는 12월에 출시되는 휘게HYGGE 블렌드입니다. 연초에는 우분투, 연말에는 휘게라니 이 무슨 외국어 잔치인가 싶지만 그 안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으니 기다려주시고요. 휘게 블렌드를 통해 우리 또 한번 모여 재미있게 놀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휘게 원두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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