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달간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 흥미로운 설전이 오갔습니다. 가향 커피(infused coffee)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죠. 여기서 말하는 가향 커피는 일반적으로 커피에 존재하지 않는 향을 인위적으로 입힌 커피를 말합니다.
비슷한 것으로 가향차(infused tea)가 있습니다. 얼 그레이 홍차가 대표적인 가향차지요. 얼 그레이를 드셔 보신 분들이라면 일반적인 홍차와 다른 싱그러운 향이 있다고 느끼셨을텐데요. 베르가못 껍질에서 추출한 오일 성분이 홍차에 첨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얼 그레이는 19세기 즈음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커피의 경우 21세기 들어서야 향을 입히려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제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서 그것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가향 커피 논의에 불을 붙인 사샤 세스틱(Saša Šestić)은 호주 커피회사 ONA Coffee의 창업자입니다. 탄소침용법(Carbonic Maceration)이라는 와인의 가공방식을 커피에 도입시킨 프로세싱 전문가이기도 하고요. 가향 커피에 대한 그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가향 커피는 가향 여부를 커피에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죠. 언뜻 듣기에는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짚어야 하는 지점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이번 레터를 통해 그동안 사샤 세스틱이 기고한 3개의 글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만한 쟁점 네 가지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본격적인 내용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기억해주셔야 할 것은, 가향 커피에 대한 논의는 현재진행형이라 앞으로 얼마든지 발전될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 레터 역시 하나의 시각으로 받아들여주시고, 추후 진행될 논의를 따라가기 위한 참고자료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출처: PERFECT DAILY GRIND, <What's the problem with infused coffee?>
가향 커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마다 가향 커피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면 논의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게 불가능할테니까요.
사샤의 제안은 '커피에 첨가한 물질의 향미가 실제 커피 음료에서도 느껴진다면 그것을 가향(infusion)으로 정의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파인애플을 첨가했고 커피 음료에서도 파인애플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가향이고, 만약에 음료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향이 아니라는 것이죠.
실제로 커피 발효에 필요한 영양성분이나 미생물을 공급하는 목적으로 생산자들이 과일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커피에 향을 입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커피 가공 전문가인 사샤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만약 커피 음료에서 그 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첨가물의 정체를 따로 표기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다소 모호한 정의라서 여러 가지 질문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커피 가공과정 중에 파인애플을 첨가한 커피가 있다고 해볼게요.
또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커피에서 느껴지는 파인애플 향이 커피 본연의 것인지 아니면 가향한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사샤는 현재 이 방법론을 연구중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같은 농장, 같은 품종의 커피를 가향 여부만 다르게 하여 생산한 후 비교해보는 세미나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해요. 사샤가 기고한 글에 남긴 가향 커피 판정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커피의 가향 여부는 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는가
사샤는 지난 두 달동안 이 논의를 위해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습니다(다음 쟁점에 링크를 달아놓았어요). 그가 언급한 가향 여부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는 이유들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에서 말하는 가향 커피는 가향 여부를 공개하지 않은 커피를 말합니다.)
사샤는 이러한 상황이 닥칠 커피업계의 미래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향 커피에 대한 규칙을 잘 정해놓지 않으면, 우리의 후손들이 위에 언급한 문제들을 겪게 될 거라고요.
출처 : PERFECT DAILY GRIND, <What's the problem with infused coffee?>
사샤 세스틱은 왜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가
사샤 세스틱의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사안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이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사샤가 가향 커피라는 의제를 꺼낸 타이밍이 왜 지금이냐'는 것인데요. 가향 커피 논의 관련 올해 타임라인을 보면 비판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샤 세스틱은 가향 커피에 대한 논의를 더 일찍 시작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이 많이 늦었다고 말합니다. 비판자들이 그 말에 의구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위 타임라인의 맨 마지막 일정인 휴 켈리의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BC) 참가 때문입니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사샤 세스틱은 ONA Coffee의 창업자입니다. 그리고 휴 켈리는 ONA Coffee 소속의 호주 바리스타 챔피언이고요. 바로 앞 쟁점에서 다루었듯이 사샤는 커피의 가향 여부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로 커피 대회 참가자들이 입게 될 불이익을 들었죠. 사샤의 비판자들은 휴 켈리가 이번 대회에서 입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그의 Perfect Daily Grind 2차 기고문에서는 1차 기고문에서 언급했던 커피 대회 참가자가 겪을 불이익을 언급하지 않고 안전과 종교 이슈에 집중했죠. 비판자들에게는 이 또한 석연치 않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사샤가 휴 켈리의 WBC 출전 때문에 이 논의를 꺼냈겠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저도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샤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이번 WBC 심사위원들은 각 참가자들의 커피를 평가할 때 '가향 커피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출처 : PERFECT DAILY GRIND, <Infused coffees: Answering some common questions>
누가 가향 커피에 대한 규칙을 설정해야 하는가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크리스토퍼 퍼란Christopher Feran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가향 커피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주체가 커피 생산국이어야 하지 않냐고 사샤에게 묻습니다. 프랑스 와인에 대한 규칙을 생산국인 프랑스에서 정하듯이 말이죠. 커피 구매자가 규칙을 정할 경우 커피 업계의 상대적 약자인 생산자들의 권익이 보호받기 어렵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또한 사샤와 같은 선진국의 커피 소비자가 규칙을 정하는 것이 제국주의적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물론 사샤도 본인이 규칙을 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업계 전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Cup of Excellence(CoE)에서 주관한 가향 커피 토크의 세 패널을 보면 공교롭게도 미국과 호주의 백인들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는 왜 여기에 생산자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패널은 없냐고 반문했고, CoE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예전에 이 주제에 대해서 에티오피아 생산자들이 패널로 참여한 토크를 진행한 적 있고, 추가적으로 저 세 패널들의 의견을 들려주고 싶었던 거라고요.
저는 크리스토퍼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커피 생산국에서 이 논의를 선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프랑스 와인의 예를 들었지만, 프랑스 같은 선진국과 콜롬비아와 에티오피아 같은 커피 생산국을 비교하긴 어려운 것 같아서요. 만약 사샤가 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샤 정도의 전문성과 영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출처 : PERFECT DAILY GRIND, <Infused coffees: Answering some common questions>
사샤 세스틱이 이야기하듯이 가향 커피 논의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향 커피의 정의도 좀 더 구체화되어야 하고, 실제로 가향 커피를 생산하는 농부들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합니다. 현재는 사샤 세스틱으로 대표되는 가향 커피 투명화 진영의 입장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상황이죠. 휴 켈리가 참가한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 대회가 끝나고 나면 아마 이 논의가 한 번 더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샤 세스틱의 의견에 공감하는지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가향 커피가 현재 스페셜티 커피 업계를 뜨겁게 달구는 의제 중 하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커피 농부, 로스터, 바리스타 그리고 커피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이 논의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주체는 없죠. 커피 업계에 몸을 담고 계신 분들이라면 계속 따라가볼 만한 주제입니다.